[포포투] 'IF'의 사전적인 의미는 '만약에 ~라면'이다. <IF 기자단>'만약에 내가 축구 기자가 된다면'이라는 슬로건을 가지고 누구나 축구 전문 기자가 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시작됐다.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부수를 발행하고 있는 'No.1' 축구 전문지 '포포투'와 함께 하는 <IF 기자단>K리그부터 PL, 라리가 등 다양한 축구 소식을 함께 한다. 기대해주시라! [편집자주]

첫 대면 당시, 금발 머리와 옐로우 렌즈의 선글라스로 표출된 그의 개성은 긴장을 낮추고 재미있는 시간이 될 것 같은 기대감을 부여했다. K리그의 ‘승격 요정’이자, 현재는 방송인으로서도 활약하고 있는 권용현은 역시나 첫 인사 때부터 유쾌한 사람이었다.

그는 방송인으로서 활동하면서 재밌는 입담을 보여주며 프로 생활 이후에도 축구 팬들에게 인간 자신의 존재감을 계속 발휘하고 있다, 또한 그는 축구 독립 구단으로 알려진 ‘양천 TNT FC’에서 여전히 선수로서도 뛰고 아카데미 감독으로서 멘토 역할도 맡고 있다.

이러한 권용현 선수의 다양한 활동은 축구 선수들의 선수 이후 진로 선택의 힌트가 될 것으로 보인다. 그렇기에 선수이자 멘토, 방송인으로서의 그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IF 기자단이 서울 양평동에 위치한 더에프(TNT의 공식 파트너)의 사무실을 찾았다.

-먼저 포포투 구독자분들께 간단한 자기소개 부탁드리겠습니다

저는 올 해 수원FC에서 은퇴했고 약 11~12년 동안 K리그에서 199경기 동안 열심히 달렸던 권용현입니다. 지금은 유튜브 채널 ‘달수네 라이브’에서 방송 활동으로 제 2의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네 본격적인 인터뷰에 들어가기 전에 먼저, 늦었지만 작년 12월 결혼에 대해 축하의 말씀을 전하고 싶습니다. 결혼 전후로 선수 생활에서 달라지신 부분이 있을까요?

정말 감사합니다. 확실히 달라진 부분은 있어요. 선수 때는 모든 포커스가 저만 신경쓰면 됐어요. 하지만 집에 들어가면 늘 혼자였던 것과는 달리 이제는 귀가 때 누군가가 있다는 것, 집에 들어올 때의 따뜻함을 기다리게 됩니다.

# 선수 권용현의 일대기

권용현 선수는 수원FC, 경남FC, 부산아이파크에서 총 3번의 승격을 이끈 ‘승격 요정’이었다. 하지만 그런 그도 처음 시작과 끝 사이의 과정은 험난했다. 그렇기에 우선 먼저 그의 커리어를 돌아보는 시간을 가져보았다.

-프로 선수 시절 주발이 어딘지 헷갈릴 정도로 양발을 잘 쓰셨는데 계기나 비결이 있을까요?

축구를 늦게 시작한 게 오히려 계기가 된 것 같아요. 오른발도 남들보다 부족한데 왼발마저도 못쓰면 안 된다고 생각해서 매일 6시간 이하로 자면서까지 그렇게 양발을 연습했어요. 15살 때부터 21살 때까지 그랬죠. 그러다 보니 6~7년 정도가 지나서는 어느 발이 주발인지 티가 안 나게 됐어요. 재밌는 건 제 프로 통산 득점 중에 오른발보다 왼발 골이 많다는 점입니다.

-처음 축구를 시작한 계기는 무엇인가요?

제 또래와 마찬가지로 2002 월드컵 시기가 계기였어요. 하지만 어려웠던 형편상 바로 축구를 시작하진 못했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 아버지와 이야기를 나눴죠. 기존에 하던 태권도에서 금메달, 그리고 학업 성적 평균 95점 이상이면 축구를 시켜달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 두 조건을 달성시켰고 아버지도 허락하셔서 중학교 1학년에서 2학년으로 올라가는 시기에 동계 시즌에 참가해 본격적으로 시작했습니다.

-프로 입성 후 계속되는 경쟁으로 인해 부담이 심하지는 않았나요?

너무 부담됐어요. 가장 힘들었던 건 제 포지션이 윙어였다는 점이죠. 윙어는 매년 한두 명씩 외국인 선수가 들어오거든요. 시즌 시작 때는 몸값이 비싼 선수가 새로 들어오죠. 그럼 동계훈련은 그 선수들이 중심이 돼요. 그럼 저는 2순위가 되고 그렇기에 누구보다 열심히 뛰어서 다시 인정을 받아야 시즌을 시작할 수 있었어요. 그래서 매년 12월을 싫어했어요. “이번엔 어떤 용병이 오나”하는 마음으로 기다려야 했죠.

 

-결국 K리그 통산 199경기에 출전한 만큼 오랜 기간 프로 선수 생활을 했습니다. 커리어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을까요?

전 선수로서 가장 기억이 남는 두 가지 순간이 있어요. 첫 번째는 데뷔전에서 PK로 데뷔골을 넣었던 때에요. 그리고 두 번째는 부산아이파크 시절 승격 확정되던 때입니다. 당시에 친정팀이던 경남과 맞붙었는데 경남을 강등시키고 부산이 승격하게 된 거죠. 팀의 승격은 기분이 정말 좋았지만 한편으론 경남 팬들에게 죄송한 마음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경기가 끝나고 경남 팬들이 북을 치며 “권용현!”을 외치는 콜을 해주셨어요. 너무 감동을 받아 울음이 나던 때였죠. 감독님도 한 번 갔다 오라고 하셔서 경남 팬들께 감사의 뜻의 박수와 인사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팬들도 기립 박수를 보내주셨습니다. 그 때는 제 축구 인생에서 가장 기억이 남는 순간입니다.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축구 커리어에서 가장 많이 울었던 날이었죠.

-특히 수원FC에서는 119경기 출전해 18득점과 19도움을 기록하며 팀의 레전드로 대우를 받고 있습니다. 수원FC에 대한 특별한 감정이 있나요?

그렇죠. 감사하죠. 프런트 형들과도 지금은 전국 각지로 흩어져 있긴 하지만 여전히 자주 연락하고 지냅니다. 기회가 돼서 제가 수원에 갈 일이 있으면 꼭 들러서 얼굴도 보고요. 사실 제겐 수원FC가 지금 얼마나 좋은 구단이 됐는지 자체는 크게 중요하지 않은 것 같아요. 상황이 좋든 나쁘든, 제게 수원FC는 그냥 좋은 팀입니다. 그래서 언젠간 꼭 다시 돌아가고픈, 고향 같은 곳이에요.

-수원FC 경기는 요즘도 자주 보러 가시나요?

작년엔 자주 보러 갔는데 올해는 주말에 너무 바빠서 자주 가진 못하고 있어요. 그래도 기회가 있으면 가려고 노력합니다. 경기장에서 노란 머리를 찾아보세요. 아마 금방 발견될 겁니다. (웃음)

# 선수로서 건강한 마인드

진지하게 인터뷰를 이어가다가도 저렇게 한 번씩 농담을 던졌다. 이외에도 나이 엄청 많은 삼촌뻘이니 편하게 하라는 말에 웃음이 나와 인터뷰 진행자들도 정말 마음이 더 편해지게 하는 그였다. 권용현 선수의 이러한 성격은 선수로서 경기에 임하는 마인드, 그리고 팬들을 대하는 마인드에서도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승격 요정’이라는 별명이 있으신데 이 별명에 대한 기분은 어떠신가요?

“어 됐다, 캐릭터 생겼다”였죠. 축구 선수는 결국 캐릭터 싸움 아니겠습니까? 김태환 형처럼 말이에요. (웃음) 참 기분이 좋았어요. 그저 열심히 달렸을 뿐인데 누군가 저를 좋게 봐줬고 팬분들과 그 별명으로 인해 서로 웃고 즐길 수가 있으니까 참 좋았습니다.

-승강 플레이오프는 지켜보는 팬으로서도 힘든데 경기를 뛰는 선수 입장에서는 얼마나 긴장되셨나요?

솔직히 그 때는 죽을 것 같았어요. 그런데 저는 조금 다른 게 있어요. 저는 위에서 떨어진 경험이 없다는 거죠. 밑에서 올라가기만 했어요. 오히려 항상 도전자의 느낌이라 즐거웠어요.

그런데 다른 분들 말로는 승강 플레이오프 상황에선 밥이 안 넘어가고 축구화 끈을 묶는데 손이 그렇게 떨렸다고 해요. 그래서 제가 어떤 마음이냐고 물었더니 “낭떠러지에 있는 것 같아. 여기서 잘못되면 뭔가 축구를 못할 것 같은 기분이 들어”라고 했어요. 그래서 전 그 말을 듣고 “어떡해 난 모르겠는데? 앞으로도 모를 것 같아”라고 장난을 치기도 했죠. (웃음)

-승강을 둔 경기에서도 긴장을 안 하고 도전자 입장에서 즐긴다고 했어요. 그래도 축구를 하면서 가장 긴장됐던 순간은 언제인가요?

유일하게 있다면 데뷔전이에요. 당시에 0-1로 지고 있었고 저는 후반 교체 투입됐죠. 근데 제가 들어가자마자 PK가 나온 거 에요. 그 때 형들이 차는 것을 주저했죠. 전 긴장하다가 당시 조덕제 감독님께 “그럼 제가 차도 돼요?”라고 여쭤보는 순간 긴장이 딱 멈췄죠. 감독님도 허락하셨고, 전 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으로 그 PK를 차서 성공시켰어요.

동점이니까 다들 좋아할 줄 알았는데 세리머니를 하러 가서 혼자 팬들이랑 기뻐하고 있었죠. 그 때 주장 형이 ”빨리 돌아와“ 그러셨죠. (웃음) 그 이후로는 경기장에서 긴장했던 순간은 없었던 것 같아요. 그 때 백신을 제대로 맞았죠. 그래서 저는 코로나도 진짜 한 번도 안 걸려 봤어요. 제 룸메이트는 여섯 번이나 바뀌었는데 저는 아무리 검사해도 안 걸렸어요. (웃음)

-코로나 얘기가 나와서 드리는 질문인데, 그 시기에 선수들도 예전보다 제약이 있던 부분이 있을까요?

제일 아쉬웠던 건 팬들이 없었다는 거죠. 골을 넣어도 선수들 메아리 소리만 들리니 분위기가 확 떨어졌죠. 원래는 입장 터널에서 나올 때 환호 소리를 듣고 시합이 시작됐다는 걸 실감하는데 코로나 시기에는 아무것도 없었죠. 그냥 연습 경기였나 싶었어요. 제가 선수 생활 중 제일 재미없었을 때가 그 때에요.

 

-실제로 경기장에 팬들이 없다면 경기력적인 부분에도 영향이 있을까요?

전 무조건 있다고 봐요. 팬들이 없다면 기본적으로 경기장 같지 않고 그냥 연습 경기 같아요. 저는 경기에 선수가 첫 번째, 두 번째가 응원해주는 팬이라고 봐요. 다른 구단 관계자분들도 다 중요하시지만 본질적으로 운동장에 팬이 없으면 안돼요. 제 기준은 그겁니다.

그럼 경기를 뛰시면서 관중석에 있던 팬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팬이 있으신가요?

많은 팬들에 대한 기억이 있지만 머릿속에 박힌 하나가 있어요. 제가 2013년에 엄지와 검지 발가락 사이를 심하게 다쳤어요. 발가락을 못 움직일 정도였죠. 의사 선생님께서 최소 1년은 잡아야 한다고 하셨고 제 수술의 국내의 3사례 전부 결국 은퇴했다고 하셨죠. 하지만 의사 선생님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전 5개월 만에 복귀했어요.

그리고 복귀전에서 45분을 뛰면서 1골 1도움을 기록했죠. 그리고 그 날 제가 티켓을 드린 부모님과 재활 선생님이 앉아 계신 걸 봤어요. 고개를 돌렸을 때 사람 뒤에 빛나는 걸 처음 봤어요. 정말 소름 돋고 펑펑 울었던 기억이 있어요. 울면서 “나 해냈어”이러니 다 같이 울고 지금도 생각하면 울컥해요. 그 때 사진이 있다면 받아 보고 싶어요.

-그 부상 기간 동안 버틸 수 있었고, 예상보다 훨씬 빠르게 복귀할 수 있던 원동력은 무엇일까요?

그냥 저를 믿었어요. 의사 선생님이 수술 3사례 모두 은퇴했다고 하셨을 때, 저는 “그럼 제가 네 번째네요? 저는 복귀합니다. 기다려 보세요”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재활을 5개월 동안 미친 듯이 했죠. 사실 걱정은 들었지만 ”안되면 그 때 많이 울고 힘들어 하고 지금은 해보자“는 마음이었어요. 처음엔 느렸죠. 하지만 ”2주 만에 발가락이 움직였네? 한 번 발목을 움직여보자“ 하며 포기 안하고 하니 힘이 됐죠.

부모님께 기대지도 않고, 와이프도 없던 때니 결국 원동력은 저 자신이었죠. 막막하긴 했지만 ”그래 뭐 여태까지 해왔는데 이것도 안 되겠나? 내 몸인데“라는 마인드로 열심히 했죠.

 

-이런 긍정적이고 밝은 성격이 팀 분위기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을 것 같습니다

그게 제 장점이라고 생각해요.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고 생각도 했죠. 경기를 지고 있든, 비기고 있든 그럴 때 제 장점이 가장 두드러진다고 믿었습니다. 팀원들이 힘들고 지칠 때 제가 파이팅을 외치고 격려할 때의 모습이 에너지로 전달됐다고 생각해요.

-그렇게 프로 선수로서는 은퇴식을 치르셨습니다. 이에 대한 생각은 어떠신가요?

정말 수원FC 프런트에 고맙고 감동 받았습니다. 저는 수원FC에서 커리어를 마무리한 것도 아니었거든요. 그래서 은퇴식은 전혀 생각도 못하고 있었죠. 저는 ”날짜만 잡아줘요 모든 일정 다 비워서 갈게요“라고 답했어요. 프로 선수에게 은퇴식은 정말 꿈입니다. 300~400경기 뛴 형들도 못한 경우가 많아요. 한국은 은퇴식 자체가 많지 않고, 그 시기 기준도 애매하다 보니 못한다고 서운해 할 수도 없죠. 해주면 정말 감사한 일이죠. 그래서 전 그 때를 위해 2주 전부터 살도 빼며 준비했습니다.

-본인의 선수 커리어를 한 문장으로 표현하자면?

”내게 10년은 정말 제일 재미있게 놀았던 시간“입니다. 앞으로도 그렇게 재밌게 놀 순 없을 것 같아요. 전 축구를 정말 좋아했고 지금도 그렇습니다. 축구장에 들어가고, 잔디를 밟는 순간이 좋았고 공만 있으면 행복해요. 10년은 제게 그런 시간이었어요. 매일매일 경쟁하고,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 공놀이를 했죠. 거기에 팬들이 찾아와 응원해 주시니 마치 부모님 앞에서 더 즐겁게 노는 아이처럼 행복했습니다. 저는 누구보다 즐겁게, 재미있게 놀았다고 생각합니다.

긍정 에너지와 확실한 캐릭터성을 잡아 팬들을 매료시킨 권용현 선수의 커리어일지는 그렇게 마무리 됐다. 하지만 그의 유쾌한 도전은 아직 현재진행형이다.

IF 기자단의 말: 권용현 선수의 이야기는 (2편)에서 계속됩니다

콘텐츠 제작='IF 기자단' 5기

글=김태현, 최태령, 김동환, 김호진

사진=이병일

현장 취재=김호진, 최태령, 김동환, 김태현, 이병일

자료조사=김동환, 김태현, 김호진, 이병일, 최태령

 

저작권자 © 포포투코리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