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포포투] 'IF'의 사전적인 의미는 '만약에 ~라면'이다. <IF기자단>은 '만약에 내가 축구 기자가 된다면'이라는 슬로건을 가지고 누구나 축구 전문 기자가 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시작됐다.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부수를 발행하고 있는 'No.1' 축구 전문지 '포포투'와 함께 하는 <IF기자단>은 K리그부터 PL, 라리가 등 다양한 축구 소식을 함께 한다. 기대해주시라! [편집자주]
축구에는 특정 포지션에 국한되지 않고 어떠한 위치에서도 자신의 기량을 마음껏 뽐내는 선수들이 있다. 우리는 그들을 ‘올라운더’라 부른다. 그리고 여기, 그라운드 바깥에서도 자신의 ‘다재다능’을 뽐내는 이가 있다. 바로 ‘iTOP21 스포츠’의 축구 해설위원이자 지스포츠 에이전시를 운영하고 있는 방상호 대표가 그 주인공이다.
방상호 해설위원은 ‘올라운더’라는 수식어가 잘 어울리는 인물이다. 엘리트 선수 출신인 그는 이른 은퇴 후 자신의 경험을 살려 유소년 축구 교실을 운영했고, 시선을 넓혀 에이전트로도 활동하며 유명 프로 선수들을 관리하기도 했다.
그의 스펙트럼 확장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지스포츠 에이전시를 설립하며 ‘고성 DMZ 유소년 축구클럽 대회’ 등 수많은 유소년 대회를 성공적으로 운영했고, 나아가 <인터풋볼>에 ‘방상호의 무모한 도전’이라는 제목의 칼럼을 기고하며 인기를 구가했다.
다양한 경험을 발판 삼아 K3, 4리그와 KF 리그를 중계하며 이제는 축구 해설위원으로서 명성을 얻고 있다. 방상호 해설위원은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더 큰 무대를 갈망하고 있다. 바로 월드컵 해설이다. ‘도전’의 연속이었고, 여전히 ‘도전’을 갈망하는 그의 이야기를 IF 기자단이 직접 들어봤다.
# 선수 방상호

중대부고등학교 시절, 대한민국 축구를 이끌 차세대 센터백으로 소문이 자자했었다. 하지만 순탄한 커리어를 이어가지 못했고 이른 나이에 선수 생활을 그만두게 됐다. 본론에 들어가기에 앞서 그의 ‘선수 생활’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과거 동북중학교와 중대부고등학교를 거치면서 최고 유망주로 불리셨어요. 당시의 선수 생활에 대해서 들어보고 싶습니다
제가 동북중학교에 입학하고, 졸업할 때까지 단 한 번도 진 적이 없어요. 전 대회에서 전승을 거뒀죠. 자연스럽게 당시 FC서울의 산하였던 동북고등학교로 진학할 수 있었는데, 억압받지 않는 환경에서 자유로운 축구를 하고 싶다는 열망이 있던 저는 중대부고등학교로 진학을 택했어요. 이 선택이 조금은 후회로 남는 것 같아요. 제가 자유로운 환경에서 생활하다 보니까 더 좋은 선수로 성장하지 못했다고 느끼거든요. 돌이켜보면 동북고등학교에 진학했다면 탄탄대로를 걸을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군장대학교를 거쳐 호주의 퀸즈랜드 로어에 입단하게 됩니다. 그 과정에 대해 여쭤보고 싶습니다
원래 고등학교 졸업 후 인천 유나이티드에 입단할 수 있었는데 여러 상황상 불발됐어요. 저는 프로팀 입단만을 바라보고 있었던 상황이라 대학 지원 기간도 놓쳤습니다. 다행히 전문대학은 지원 기간이 길어서 수료증을 받는 조건으로 1년 동안 군장대학교에서 뛰게 됐어요. 그다음에 호주로 넘어갔죠. 지금은 브리즈번 로어라는 팀인데 그때는 퀸즈랜드 로어였어요.
퀸즈랜드 로어에서 좋은 선수로 거듭나기 위해서 열심히 노력했는데 순탄치만은 않았어요. ‘한국 선수는 잘 뛴다’라는 인식이 커서 제가 맞지 않는 포지션에서 뛰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1년 동안 뛰고 한국으로 들어오게 됐어요.
-말씀하셨듯이, 조금은 이른 나이에 은퇴를 선택하셨습니다. 은퇴를 선택한 시점에 미래에 대한 특별한 계획이 있으셨나요?
조금은 버거웠던 호주 생활과 부상 등 여러 요인이 겹쳐 스물한 살이라는 이른 나이에 은퇴를 택하게 됐어요. 어린 나이다 보니까 은퇴 직후엔 “이런 걸 해봐야겠다”라는 구체적인 계획은 없었어요. 솔직하게 허송세월이었죠. 왜냐하면, 지금과는 다르게 선수 학생들은 학교 수업을 들을 수가 없었거든요. 당시에도 최소 4교시는 받아야 하는데 학교 선생님은 수업에 방해가 되니 나가라고 하는 거죠. 그러면 학교를 몰래 나가서 피시방에 가 있는 거예요. 결과적으로 축구 선수의 삶에서 벗어나니까 어떤 걸 해야 할지 모르겠더라고요.
# 선수 은퇴, 그 후

이른 나이에 꿈이 좌절된 그는 방황의 시간을 겪었다. 그동안 축구라는 울타리 안이 익숙했던 그에게 세상 바깥은 너무나도 낯선 환경이었다. 그러나 그는 흔들리던 시기를 성장의 계기로 바꾸었다. 우연한 기회로 축구를 다시 접한 방상호 대표는 유소년 아이들을 가르치다가 직접 축구 교실을 운영하고, 에이전트의 길로 입문하게 됐다. 여기서 그는 한 걸음을 더 나아갔고, 지스포츠 에이전시를 설립하며 성공 가도를 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현재는 해설위원으로 활약하며 월드컵 해설이라는 목표를 향해서 정진하고 있다.
-선수 은퇴 이후 유소년 코치로 첫발을 내딛게 됩니다. 어떤 기회로 아이들에게 축구를 가르치게 되셨나요?
은퇴 이후 첫 직업은 모델이었어요. 그러다가 친구를 통해서 축구 교실에 코치로 들어가게 됐는데, 그곳에서 축구 지도에 대한 것들을 습득하며 나중에는 축구 교실을 운영하게 됐습니다.
축구 교실을 운영하면서 어려움도 컸어요. 가장 힘들었던 부분은 아무래도 유명하지 않았던 선수였기 때문에 원생 유치가 쉽지 않았던 거예요. 유명하지 않았던 선수여도 좋은 지도자가 될 수 있어요. 하지만 자신의 아이들을 맡기는 입장에서 부모님들은 유명 선수 출신이 운영하는 교실에 맡기고 싶어 하더라고요. 저도 이해는 돼요. 그래도 저는 이를 넘어서기 위해서 아이들의 심리를 활용해서 가르치려고 노력했어요. 덕분에 점차 좋은 상황으로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축구 교실을 성공적으로 운영하시다가, 에이전트로 시선을 넓히게 됩니다. 어떤 계기로 에이전트로 일하게 되셨는지 궁금합니다
축구 교실을 운영하기 전에, 코치로 일하고 있을 당시 감독님께서 에이전트 회사의 대표가 되셨어요. 그분께서 제게 사무 행정 일을 도와달라 요청하셔서 에이전트 업계에 발을 들이게 되었고, ‘직접 선수를 관리해 보고 싶다‘는 마음을 가지게 됐어요.
제가 유명한 선수는 아니었지만, 유명한 선수들을 많이 알고 있었기에 이를 활용해서 인프라를 넓히고 싶었어요. 에이전트 일은 거의 무일푼으로 했어요. 다행히 수익원이 있었기 때문에 ‘인프라 확장’이라는 목표만을 향해서 나아갈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선수를 관리하는 ‘에이전트’로 일을 하다가 대회를 주최하는 ‘에이전시’로 범주를 확장하면서 성공을 거두셨습니다
저는 에이전트를 하면서도 ‘신용’을 중요하게 생각했어요. 처음 했던 이야기를 지키려고 노력했고, 상대에게 예의를 지키기 위해서 노력했죠. 에이전시로서 대회를 주최하기 위해 나섰을 때도 마찬가지였어요. 지자체와 협상하든, 기업체와 협상하든 결국 사람과 사람이 대화를 나누어 결과를 내는 거잖아요. 저는 제가 지켜왔던 ‘신용’을 강조했고, 계약 후에도 꾸준히 이를 지키려 노력하다 보니 계속해서 성공적으로 유소년 대회를 주최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그렇게 성장한 끝에 이제는 자신 있게 유소년 축구 대회 주최와 관련해서는 상위권 에이전시라 이야기할 수 있어요. 요즘은 지자체에서 먼저 대회 유치를 위해 연락이 오기도 합니다. 감사할 따름이죠.

-지스포츠 에이전시에서 ‘엄브로 일레븐 드림’ 프로젝트도 진행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어떤 프로젝트인지 자세한 설명 부탁드려도 될까요?
저희 지스포츠 에이전시는 아이들의 대회 참가비가 주 수익원인 회사입니다. 덕분에 회사가 커질 수 있었고, 이제는 안정적인 위치에 올라와 있다 보니 ‘우리가 받은 만큼 돌려주자’라는 생각을 가지게 됐어요. 그래서 아이들에게 전액 장학금을 지원해 주는 이 프로젝트를 시작하게 된 거예요.
이러한 취지로 시작한 ‘엄브로 일레븐 드림’ 프로젝트는 전국의 초등학교 4학년 학생들을 대상으로 우수 선수들을 선발한 다음, 해외로 데려가 대회에 참가하는 방식으로 진행됩니다. 유튜버 고체티노가 설립한 ‘고다지’라는 회사와 함께하고 있습니다. 고다지에서 이 프로젝트에 공동 투자를 했고, 엄브로에서 지원을 받아 진행하게 됐습니다.
최근에 태국에서 대회가 열렸는데, 저희가 우승하면서 아시아 대표로 선발돼 올해 5월에 스페인에서 열리는 세계 대회에 출전하게 됐습니다. 스페인의 여러 구단을 비롯해 이탈리아의 AC 밀란, 프랑스의 올림피크 마르세유, 그리고 브라질의 여러 구단이 참여하는 비교적 큰 대회입니다. 아이들에게 좋은 기회가 될 것 같아요.
-유소년 축구계에 대해 깊은 내공이 있는 종사자로서 한국 유소년 축구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어떤 노력이 필요할까요?
우선, 지도자의 처우 개선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지금의 지도자들은 학부모님들이 내는 수강료가 수입원이에요. 그 돈으로 장비를 사야 하고, 코치에게 월급도 줘야 하는 거죠. 그러다 보니 수강생들을 많이 모집하기 위한 상업적인 목적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되고, 본질인 ‘육성’에만 초점을 두기 어려워지는 거죠. 일본의 경우는 국가에서 지도자들에게 금전적인 지원을 해줍니다. 그래서 일본 지도자들은 태블릿과 같은 기술을 적극적으로 이용해서 과학적으로 아이들을 가르칠 수 있게 됐어요. 일본의 유소년 축구가 발전을 거듭한 이유기도 하죠.
그리고 아이들에게 지금보다 더욱 다양한 경험이 제공되면 좋을 것 같아요. 단적인 예로서 대한축구협회 차원에서 주최하는 대회인 주말 리그는 ‘우승 팀’이란 타이틀이 공식적으로 없어요. ‘승부 경쟁을 없앤다’는 취지인데, 아쉬운 부분이죠. 트로피를 들어 올려보는 경험도 좋은 경험이거든요. 동기부여와 승부 의식 고취의 측면에서 중요하기 때문이에요. 윗선에서 현장의 이야기를 들어보면서 아이들에게 다양한 경험을 제공할 수 있는 방향에 대해 고민하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에이전시 대표직뿐만 아니라 해설위원직도 맡게 되셨습니다. 해설위원으로 활동하게 된 배경이 궁금해요
축구 선수를 그만둔 후에 크게 계획을 두고 일하는 타입은 아니었어요. 주어진 순리대로 따라가다 보니 수입원이 생겼고, 그렇게 생계가 안정되다 보니 꿈꾸게 되더라고요. 그렇게 처음 꾸게 된 꿈이 해설위원이에요.
가고 싶었던 곳이 있었는데 결과적으로 무산됐어요. 하지만 목표 의식은 이미 생겼고, 어떻게든 꿈을 이루고 싶었어요. 그러다가 우연하게도 iTOP21닷컴 대표님을 소개받게 됐습니다. 제가 매달 한 번씩 “저 좀 써주세요, 기회를 주세요”라고 전화를 드렸거든요.
2년 동안 대표님께 연락드렸는데 결국에 대표님이 제 정성에 질리신 거예요. 그러면서 한번 만나보자고 하셨죠. 만나 뵌 자리에서 제가 해왔던 일들을 적극적으로 어필했습니다. “해설위원이 되기 위해서 칼럼을 썼고, ‘인터풋볼’에서 프리뷰 영상도 찍었다”는 내용이었어요.
처음에는 해설위원이 된다고 하더라도 초등리그나 K7 리그에 투입될 거라고 하셨는데, 제가 준비해온 경력들과 자료들을 살펴보신 후에는 곧바로 K3리그 중계를 맡겨 주셨어요. 제가 준비해온 게, 그리고 살아온 삶이 큰 보탬이 된 것 같아 성취감이 매우 높았습니다.
-해설위원이 되시는 데 ‘인터풋볼‘에 기고하신 칼럼이 큰 역할을 한 거네요
맞아요. ‘인터풋볼’에 ‘방상호의 무모한도전’을 기고했던 게 정말 큰 자산이라고 생각해요. 당시에 제가 일이 잘 풀리지 않았거든요. 그래서 친했던 정지훈 기자님께 칼럼을 쓰고 싶다고 부탁했어요. 그렇게 시작했는데 글을 쓰는 게 너무 어렵더라고요. 혼나기도 많이 혼났고요. 근데 결국엔 버텨냈고, 칼럼을 썼던 데이터가 너무나도 좋은 자양분이 됐어요. 지금도 정지훈 기자님한테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있어요.
-그렇다면 1편의 마지막 질문으로, 해설위원으로서의 최종 목표는 무엇일까요?
지금은 방상호 ‘대표’로 많이 불리는데, 앞으로는 방상호 ‘해설위원’이라는 호칭을 더 자주 듣고 싶어요. 그러기 위해서는 수없이 노력해야겠죠. 지금도 끊임없이 발전을 위해서 노력하고 있습니다. 한 번 더 생각을 정리해 말하려고 하고, 적정한 목소리 톤으로 말하는 법을 의식하려고 해요. 그리고 수많은 경기와 기사를 보면서 전문 지식도 계속해서 갈구하고 있습니다.
나아가 해설위원으로서 최정상의 위치에 오르는 게 최종적인 목표입니다. ‘월드컵 해설’을 꼭 한번 해보고 싶거든요. 아직 많이 부족하지만, 저는 계속 도전해서 무조건 목표를 이뤄낼 겁니다.

IF 기자단의 말: 방상호 대표의 이야기는 (2편)에서 계속됩니다
콘텐츠 제작='IF 기자단' 3-4기
글=최진영, 이주엽, 송청용
사진=이주엽
현장 취재=박선웅, 정광윤, 김주혁
자료조사=박정영, 홍승완, 박선웅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