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포포투] lounge(라운지)의 사전적인 의미는 공공건물이나 상업용 건물 등에서 휴식, 대화 할 수 있는 공간을 말한다. 세계에서 가장 많은 부수를 발행하는 축구 전문 매거진 <포포투>는 축구 팬들이 잠시 쉬어가며, 편하게 읽을 수 있는 콘텐츠를 준비했다. 축구 레전드들의 숨겨진 이야기를 들어보자! [편집자주]
“나는 박테리아에 감염되었고, 그것은 근본적으로 내 커리어를 끝냈다. 의사들은 내 발을 절단하는 것까지 생각했다”
덴마크 공격수는 보스만룰, 폴 머슨과의 축구 그리고 미들즈브러의 ‘준우승 트레블’에 대해 이야기한다.
Q. 당신의 아버지가 프로 축구선수였는데, 그가 너의 커리어에 영향을 주었는가?
A. 모든 아버지들이 그렇듯이 나의 아버지도 나에게 영향을 주었다. 그는 나에게 축구를 보여주었고 나를 축구의 세계로 끌어들였다. 그는 나에게 훌륭한 조언을 해주었고 지도했다. 그러나 절대 나에게 프로 축구선수가 되라고 강요하는 법은 없었다. 그는 항상 “먼저 학교부터 마쳐라. 그리고 어떤 진로를 선택할지 보자”라고 말하셨다. 모든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난 나의 국가를 대표할 날과 해외에서 플레이하는 것을 꿈꿨다.
Q. 왜 1996년에 포르투나 쾰른에서 미들즈브로 이적하는 것이 오래 걸렸나?
A. 장-마르크 보스만이 그의 사건과 관련해 법정 싸움에서 이겼을 때는 여름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하룻밤 사이에 축구의 모든 이적 시스템을 바꿨다. 나의 계약은 만료되었지만, 내 이전 클럽은 나를 1년간 더 데리고 있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난 ‘보스만룰’이 확실했고, 자유롭게 클럽을 떠날 수 있다고 믿었다. 난 보로와 사인할 수 있도록 싸워야 했다. 그 과정이 진행될 때, 난 보로에서 뛰지 못했다. 판결이 날 때까지 난 훈련만 할 수 있었다.
Q. 그 팀의 역사에 있어서 특별한 시간에 팀의 일원으로 있는 것에 대해 기분이 어땠나?
A. 미들즈브러에서는 굉장히 흥미로운 시간이었다. 클럽은 야망이 있었고, 파브리지오 라바넬리, 에메르송, 주닝요 같은 엄청난 선수들로 국제적인 규모의 팀을 구성했다. 난 영국 무대에서 뛰는 것은 꿈꿔왔고, 그곳에 도착하던 그 순간부터 느낌이 좋았다. 구단주인 스티브 깁슨은 다시 프리미어리그로 돌아가기 위해 팀에게 많은 것을 해주었다. 그는 지역에 믿을 수 없는 선수를 사왔고, 팬들에게 몇 년간 재미있는 축구를 선사했다.
Q. 감독으로써 브라이언 롭슨은 어땠나?
A. 그는 선수로써 굉장히 경험이 풍부한 선수고, 그의 지도 기술로 팀의 모든 선수들을 최고의 상태로 끌어올리려고 노력했다. 그는 맨유와 영국 국가대표팀의 주장이었고, 내가 자랄 때 우상 같은 선수였다. 난 브라이언 롭슨 감독이 선수였을 때 그를 존경했기에, 그를 감독으로 모시는 것은 꽤나 특별했다.
Q. 너의 첫 시즌에, 미들즈브러는 블랙번과의 경기에서 선수들을 채우지 못해 승점 3점이 삭감됐고, 그것은 뼈아팠다. 무슨 일 있었던 것인가?
A. 내 생각엔 모든 선수들이 어려움을 겪었던 것 같다. 우리는 만약 우리가 질병으로 인해 특정 선수 수를 채우지 못한다면 리그사무국에 연락해 경기를 진행하지 못한다고 주장할 수 있다고 들었다. 불행하게도, 그들은 인정하지 않았다. 그리고 시즌 말에 경기를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승점 3점을 삭감했다. 그것이 제일 힘든 부분이었고, 우리를 강등시켰다. 받아들이기 힘들었지만 우리는 헤쳐 나가야만 했고, 보로를 프리미어리그로 되돌려 놓아야 했다.
Q. 미들즈브러가 강등당하고, 리그컵과 FA컵 결승에서 진 파란만장한 시즌이었다. 그 모든 것은 어떻게 기억하나?
A. 최고점과 최저점을 모두 겪은 시즌이었다. 두 번의 결승전에서 잘 시작했지만 경기에서 패배하며 나쁘게 끝났다. 게다가 승점 3점 삭감과 강등을 당했다. 너무나도 길고 많은 경기들이 있던 시즌이었다. 나는 단일 시즌에 그렇게 많은 경기를 소화해본 적이 없기에 체력적으로 많이 지쳐 있었다. 남은 체력이 없었고, 그것이 내가 FA컵 결승전에서 선발로 뛰지 않은 이유일 것이다. 난 라바넬리의 부상으로 인해 일찍 출전했지만 디 마테오의 43초 골로 인해 뒤처지던 상황이었다. 첼시는 그 이후 순조롭게 나아갔다.
Q. 당신은 1998년 보로가 프리미어리그로 승격했을 때 팀 내 최다 득점자였다. 승격할 때 그런 중요한 역할을 맡는 것을 기분이 어떤가?
A. 보로처럼 대단한 클럽에서 강등이 되면, 선수로써 그 팀이 속해 있어야 할 자리로 돌려놓는 것이 일이다. 난 남아서 프리미어리그로 복귀하는 것을 돕고 싶었다. 우린 결국 주닝요와 라바넬리를 각각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와 마르세유로 떠나보냈지만, 폴 머슨과 폴 개스코인이라는 흥미로운 계약도 만들어냈다. 다른 동료들은 남았고, 우린 엄청난 시즌을 보냈다. 난 팀 내 최다 득점자로 시즌을 마쳤고, 그것은 나에게 굉장히 특별했다. 나와 머슨은 서로를 잘 이해했다. 손발이 척척 맞았다.
Q. 보로에서 ‘Gazza(폴 개스코인의 별명)’에 대한 기억은 무엇인가?
A. 슬프게도, 개스코인은 최상의 몸 상태가 아니었고 난 그가 최고의 폼일 때 같이 플레이하지 못했다. 우린 그가 얼마나 놀라운지, 얼마나 환상적으로 플레이할 수 있는지 알 수 있다. 하지만 그 당시 개스코인은 우리 모두가 기억하는 그 개스코인이 아니었다. 그 역시 개인 생활에서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그래도 그를 알아가는 것은 재미있었다.
Q. 1999년 3월에는 왜 더비 카운티로 이적했나?
A. 롭슨 감독은 브라이언 딘, 알룬 암스트롱 그리고 마르코 브랑카 같은 여러 공격수들을 영입했고, 우린 갑자기 많은 공격수 옵션을 가지게 되었다. 더비는 이전부터 날 원했고 다시 한 번 나에게 접근했다. 보로는 나에게 이적을 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라고 말했다. 난 가기 싫었지만 새로운 도전을 위한 때가 된 것 같다고 생각했다. 난 아마 잔류했어야 됐지만, 이미 벌어진 일은 바꿀 수 없다.
Q. 더비 카운티에서의 감독인 짐 스미스는 악명 높은 사람이다. 그의 스타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A. 우린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그것은 최선의 이적이 아니었고, 난 더비와 사인하지 말았어야 했다. 더비 카운티에 있어서 좋은 시기가 아니었고, 짐 스미스는 나와 잘 맞는 감독이 아니라는 것을 바로 알 수 있었다. 난 그가 선수들을 다루는 방법을 좋아하지 않았고, 그의 지도는 브라이언 롭슨의 방식과는 매우 달랐다. 난 그를 좋아했던 선수가 아니었고, 그와 친하게 지내지 않았다. 그것은 큰 문제였고, 스티브 맥클라렌이 맨유의 수석코치로 떠난 것 역시 그러했다. 스미스는 그 이후로 많은 수석코치들을 만났지만, 맥클라렌 같은 사람은 찾을 수 없었다.
Q. 당신의 부상 문제는 언제 시작했고, 그것이 당신 커리어에 어떻게 영향을 주었는가?
A. 난 릴과 사인을 할 때까지만 해도 부상을 잘 당하지 않았다. 병원에서 스캔 결과 발목에 피로 골절이 있었다. 그런데 어쩌다 보니 박테리아에 감염되었고, 그것은 근본적으로 내 커리어를 끝냈다. 관절에 감염은 뼈 구조, 연골, 인대 같은 모든 것을 갉아먹는다. 의사들은 내 발을 절단하는 것까지 생각했다고 인정했다. 난 다시 필드로 복귀하려 했지만 해내지 못했다. 내 발은 더 이상 축구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Q. 축구 선수 은퇴 이후 어떤 점에 이끌려 에이전트가 되었나?
A. 난 재능 있는 어린 선수들과 일하는 것을 즐기고, 그들을 올바른 방향으로 지도하려 노력했다. 에이전트 일을 하면서 좋은 점은 전 세계를 여행할 수 있다는 것과 내 커리어를 통해 배운 모든 언어를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난 덴마크의 주장인 시몬 키예르, 아스톤 빌라의 뤼카 디뉴 호주 국가대표팀 골키퍼인 매튜 라이언의 에이전트이다. 난 그들이 15살이었을 때부터 내 에이전시에서 그들을 돕고 있다. 그 결과 돈독한 관계를 얻었고, 일보다는 가족과 같은 관계가 되었다.
인터뷰=Sean Cole
에디터=‘IF 기자단’ 2기 김용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