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포투] 그냥 묻히기에 아까운 기사만 모았다. 포포투 한국판이 재발간 될 때까지 영국 최고의 풋볼매거진 '포포투'의 독점 콘텐츠를 온라인으로 전달한다. ''들의 단독 인터뷰부터 비하인드 스토리까지, 흥미로운 이야기를 '442.exclusive'를 통해 함께 한다. 기대하시라. [편집자주]

아스널의 전설이자 고집불통 미드필더인 폴 머슨은 포포투와의 '플레이어 라운지' 인터뷰에서 도박, , 마약 중독에 대해 털어놓았다. 그는 승승장구하던 당대 아스널과 미들즈브러 시절 폴 개스코인과 함께 지낸 일화를 공개했다.

- 사실 잉글랜드 유스의 황금기라고 하면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클래스 오브 92'를 떠올리기 쉽다. 하지만, 아스널도 1980년대 수많은 유스 출신 스타를 배출했다. 유스 시절 어땠는가?

그야말로 황금 세대였다. 토니 아담스부터 데이비드 로캐슬, 미카엘 토마스, 나이얼 퀸, 마틴 키언까지. 이들 모두 잉글랜드 대표팀의 부름을 받곤 했다. 물론 나도 그들 중 한 명이었지만 스스로 턱없이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다른 선수들이 빠르게 치고 나갈 동안 내 입지는 점점 위태로워졌다. 솔직히 말하면 내 한계에 부딪혔다고 생각했다. 결국, 스스로를 향한 의심에 시달리느라 축구를 즐기지 못했다.

그러던 와중 돈 하우 감독이 몇몇 유스들을 필요로 했고 나도 1군에 콜업됐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내게는 1군 무대가 더 편하게 느껴졌다. 찰리 니콜라스, 케니 샌섬 같은 선배들이 나를 좋아하고 고평가해 줬다. 나는 1군에서 비로소 안정감을 찾을 수 있었다. 내 축구 인생은 거기서 시작됐다.

- 절정은 1988-89시즌이었다. 당시 황금 세대는 최종전에서 리버풀을 꺾고 우승을 차지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날 밤이 기억나는지?

어느 정도 나이가 있다면 자신이 그날 밤 어디에 있었는지 기억날 것이다. 그만큼 극적인 밤이었다. 맨유 팬이든 애크링턴 스탠리 팬이든 상관없다. 정말 그 누구라도 기억할 것이다.

그러나 정작 그 경기에 직접 관여한 나는 그날의 기억이 너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지금도 그날 밤에 대해 거의 기억하지 못한다. 그 경기가 종료되고 런던으로 돌아가는 길에는 온통 코치에게 맥주를 얼마나 먹일지에 대한 고민뿐이었다. 아직도 그날을 추억하고 감사할 수 있어서 정말 행복하지만, 솔직히 기억이 잘 나지는 않는다.

- 어린 유망주로서 조지 그레이엄 감독은 얼마나 중요했는가?

그레이엄 감독은 모든 것을 가능하게 했다. 그는 우리 유망주들에게 정말 많은 것을 가르쳤고 내게 많은 동기를 부여했다. 죽어라 뛰어야 했지만, 분명 그가 없었다면 1989년 리그 우승은 꿈도 꿀 수 없었을 것이다. 실제로 나를 비롯한 대다수의 어린 선수들은 그레이엄 감독이 최종전에서 우리에게 기회를 주지 않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하지만 큰 오산이었다. 그는 3명의 센터백을 세우는 전술을 꺼내 들었고 이것이 제대로 효과를 봤다.

1991년에는 훨씬 더 발전했다. 2년 전 워낙 극적인 우승을 차지한 탓에 언급이 많지는 않았지만, 우리는 조용히 강했다. 결국 아스널은 1990-91시즌 리그에서 단 1패만을 기록했다. 첼시에 당한 그 1패마저도 경기에 나설 센터백이 한 명도 없었던 날이었다.

- 과거 아스널의 '투스데이 클럽(*선수단의 유대감을 형성하기 위한 과음 문화)'은 여전히 감탄을 자아낸다. 건강은 차치하고 그 당시 음주 문화가 그렇게 중요했는가?

그 당시에는 거의 모든 팀에 그런 음주 문화가 있었다. 그중에서도 아스널은 단연 최고였다. 실제로 리버풀과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는 누가 더 많이 마시는지 경쟁이 붙기도 했다! 그리고 그런 문화가 선수단의 단합에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감독들은 앞장서 음주를 장려했다. 우리는 함께 술을 마시며 서로에게 용기와 투지를 북돋아 줬다. 그레이엄 감독 역시 같은 이유로 1년에 세 번 정도 우리를 스페인 마르베야에 데려가곤 했다. 만약 스마트폰이 있었다면 절대 일어나지 못했을 일이다!

- 1990년대 초반 축구는 래디즘(*영국 노동자 계층의 거친 문화)의 일부로 여겨졌다. 당시 했던 음주 세리머니를 보면 무슨 생각이 드는가?

그 세리머니 사진은 내가 가장 많은 사인을 한 사진이다. 사실 사인할 때마다 움찔하긴 했다. 그렇지만 그 세리머니가 바로 내가 살아가는 방식이었다. 축구 하고 술 마시러 가고, 축구 하고 술 마시러 가고. 물론 바람직하지는 않았지만, 그런 점 때문에 팬들이 나를 좋아했던 것 같다. 내가 그들과 다를 바 없는 평범한 사람이라고 본 것이다.

맞는 이야기다. 나는 그저 우연히 축구를 한 평범한 사람일 뿐이다. 심지어 나는 고급스러운 와인바에 간 적도 없었다. 매일같이 펍에서 맥주만 마셨다. 그때마다 그레이엄 감독은 "네가 누구인지, 무엇을 대표하는지 생각해라"라고 말했다. 당시 나는 프로 축구 선수였고 잉글랜드에서 손꼽히는 빅클럽인 아스널을 대표하고 있었지만, 그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50대가 돼서야 그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 1997년 아스널을 떠난 이유는?

아스널이 재계약을 제안하긴 했지만 결국 문제는 돈이었다. 그러던 와중 미들즈브러가 내게 엄청난 금액을 불렀고 그 유혹을 차마 거절할 수 없었다. 당시 미들즈브러는 챔피언십(2부리그)에 있었음에도 그들이 내게 제시한 주급이 아스널이 데니스 베르캄프에게 지급하던 주급보다 높았다. 훗날 돈이 다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됐지만, 도박에 빠져 있던 나는 그 유혹을 도저히 뿌리칠 수 없었다.

- 오히려 아스널을 떠나고 더 잘 나가던데?

아스널 같은 빅클럽에서 뛰면 사람들의 인정을 받기 쉽지 않다. 매주 심한 압박감에 시달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들즈브러, 아스톤 빌라, 포츠머스에서는 정반대였다. 오히려 축구가 술과 도박의 중독으로부터 해방되는 돌파구 같았고, 훨씬 마음 편하게 뛸 수 있었다. 그리고 내가 이번 주에 부진했더라도, 어차피 그다음 주에 또 출전할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거기서 안정감을 느꼈고 축구를 더욱 즐겼던 것 같다.

- 미들즈브러에서 폴 개스코인과 집을 함께 썼다. 개스코인은 조용하고 좋은 룸메이트였는지?

그놈의 슬리퍼와 오발틴(*우유 음료를 만들기 위한 가루)!(웃음) 개스코인도 만만치 않았다. 그는 집 안에서 옷 입고 있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는 집에 들어오자마자 입고 있던 모든 옷가지를 벗어 던지고 소파에 앉았다. 장담컨대 그 뒤로 소파에 앉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것이다. 지금 돌아보면 미친 짓처럼 보이지만, 우리는 그걸로 온종일 웃곤 했다.

- 잉글랜드 대표팀 경력은 만족하는가?

나는 21번의 출전이 정말 자랑스럽다. 다만 소속팀에서 보여준 폼을 대표팀에서는 보여준 적이 없어서 아쉬움이 남는다. 내가 2부리그에서 꽤 인상적인 활약을 펼치는 동안 1998 프랑스 월드컵에서 한 차례 출전한 적이 있었다. 그것과 내 선수 경력을 생각해보면 잉글랜드 기사 작위를 받아도 이상할 것이 없다! 내 말은 마약에 손을 대면서 그와 동시에 대표팀에서 뛰기는 그만큼 쉽지 않다는 것이다. 실제로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 축구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자면?

내 어린 아들이 이제 여섯 살이 됐다. 나는 아들이 축구 하는 것을 보는 게 정말 행복하다. 내게는 축구가 전부라서 다른 이야기는 할 수가 없다. 나는 그 누구와도 앉아서 축구 이야기를 할 수 있을 정도로 축구를 사랑한다.

번역=유다현 에디터

사진=게티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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