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포포투=Joe Brewin]
번리로 간 에시앙, 리버풀로 간 라우드럽, 심지어 덤버턴으로 간 크루이프까지. 지금은 어색한 그림이지만 당시에는 충분히 일어날 수 있었던 이적이었다. 아마도 우리는 몇 년 안에 아스널로 갈 뻔한 유벤투스의 슈퍼스타 두산 블라호비치에 대해 이야기할 것이다. 앞서 언급한 세 선수와 비슷한 맥락에서 말이다.
과거 존 오비 미켈은 맨유와 계약서에 서명한 채로 첼시에 입단했다. 당시 미켈을 놓고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첼시가 벌인 쟁탈전은 이적 파동으로 번져 나갔다. 다비드 데 헤아의 경우 팩스 송신 문제로 서류가 제시간에 제출되지 않아 꿈에 그리던 레알 마드리드 이적이 허무하게 무산된 바 있다.
이외에도 가지각색의 이유로 성사되지 못한 이적은 넘쳐난다. 포포투가 그 가운데 덜 알려진 역대급 이적 사가 10건을 모아 봤다.
1. 미카엘 라우드럽(브뢴뷔→리버풀, 1983년)
덴마크 전설인 라우드럽은 19세의 어린 나이로 브뢴비에서 돌풍을 일으켰다. 그를 주시하던 리버풀은 3년 계약을 제안했고 얼마 안 가 합의를 마쳤다. 라우드럽은 "나는 계약이 성사됐다고 생각하며 안필드에서 나왔다"라고 회상했다.
하지만 다른 국면이 펼쳐졌다. 2주 뒤에 리버풀이 계약 기간을 4년으로 연장하자고 제안한 것이다. 라우드럽이 성장하는 데 아직 시간이 더 필요하다는 이유였다. 이에 실망한 라우드럽은 계약을 거절하고 유벤투스로 향했다. 이후 바르셀로나, 레알 마드리드를 거치며 승승장구했다.
2. 주니뉴 파울리스타(아틀레티코 마드리드→아스톤 빌라, 1999년)
1999년 1월 존 그레고리 감독이 이끌던 빌라는 리그 2위를 달리고 있었다. 우승 경쟁에 박차를 가하기 위해 겨울 이적시장에서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의 주니뉴 영입을 시도했다. 이에 빌라와 아틀레티코는 1,200만 파운드(약 195억 원)의 이적료로 거래에 합의하는 듯했다.
그러던 와중 아틀레티코의 헤수스 힐 회장이 돌연 병원 신세를 지게 됐다. 당시 아틀레티코의 보드진은 선수단 운영에 깊숙이 관여하던 힐 회장의 허락 없이 협상을 진행하길 꺼렸다. 실제로 힐 회장은 3시즌 동안 무려 15명의 감독을 경질하며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결국, 거래는 무산됐고 주니뉴는 그로부터 3년 뒤 다시 미들즈브러로 이적했다.
3. 뮐레르(상파울루→에버턴, 1994년)
게르트 뮐러도, 토마스 뮐러도 아니다. '뮐레르'라는 별명으로 알려진 루이스 안토니오 코헤아 다 코스타다. 뮐레르는 1994년 국제축구연맹(FIFA) 미국 월드컵에서 브라질의 우승에 일조하며 에버턴의 눈에 들었다. 이적에 근접하자 당시 에버턴을 이끌던 마이크 워커 감독은 공식 기자회견까지 마련했다.
그러나 기자회견 30분 전 뮐레르에게 날벼락 같은 소식이 전해졌다. 자신이 계약한 주급 2만 파운드(약 3,240만 원)가 세전 금액이라는 것과 구단에서 주택과 자동차를 제공하지 않는다는 것. 이에 그는 기자회견 30분 전 구디슨 파크를 홀연히 떠나 일본 J리그의 가시와 레이솔에 합류했다. 현재는 은퇴 후 목사로 사역하고 있다.
4.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로스 미요나리오스→바르셀로나, 1952년)
디 스테파노는 레알이 자랑하는 최고의 레전드다. 보조 구장의 이름을 디 스테파노의 이름에서 딴 '에스타디오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로 지을 정도이니 말이다. 하지만 그가 레알의 최대 라이벌인 바르셀로나와 계약할 뻔했다는 사실은 생각보다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아르헨티나 출신인 디 스테파노가 스페인에 상륙했을 당시 가장 먼저 접근한 것은 바르셀로나였다. 심지어 그는 1953년 바르셀로나의 프리시즌 친선경기에 출전하기도 했다.
하지만 협상이 늦어지자 레알이 미요나리오스와 계약하며 선수를 쳤다. 디 스테파노는 이중 계약 신세가 됐으나 바르셀로나는 이를 알 턱이 없었다. 결국, 스페인 축구 협회와 FIFA까지 뒤엉키며 상황이 복잡하게 흘러갔고 기나긴 소동 끝에 레알이 웃었다. 디 스테파노는 레알에서 라리가 우승 8회를 비롯해 1995년부터 유러피언컵(챔피언스리그 전신) 5연패를 달성하는 등 수많은 트로피를 들어 올렸다.
5. 라울 곤잘레스(레알 마드리드→토트넘 훗스퍼, 2008년)
라울은 디 스테파노 은퇴 이후 레알의 공격을 책임지며 상징적인 존재가 됐다. 그는 실제로 741경기 324골을 넣으며 디 스테파노를 뛰어넘는 레알 최다 출장 및 최다 득점 기록을 썼다. 번외로 현재 최다 득점 기록은 450골을 터뜨린 크리스티아누 호날두가 가지고 있다.
한편 2008년 후안데 라모스 감독이 토트넘에서 경질되지 않았다면 화이트 하트 레인에서 라울을 볼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훗날 라울은 "라모스 감독은 나와 에이전트가 함께 한 식사 자리에서 토트넘 이적을 제안했다"라고 밝혔다.
그렇게 구두 합의를 마친 듯했으나 토트넘 보드진은 라모스 감독의 경질을 발표했다. 후임으로 해리 레드냅 감독이 선임됐고 라울은 그대로 레알에 남았다. 아이러니하게도 라모스 감독이 레알의 소방수로 부임하며 라울을 다시 만났다.
6. 폴 개스코인(뉴캐슬 유나이티드→맨체스터 유나이티드, 1988년)
1987-88시즌이 끝나기 전날 밤 개스코인은 알렉스 퍼거슨 감독에게 전화를 걸어 "감독님 휴가 잘 다녀오세요. 제가 곧 맨유로 갈 것 같아요"라고 말했다. 그렇게 휴가를 떠난 퍼거슨 감독은 회장으로부터 뜻밖의 전화 한 통을 받았다. 개스코인이 맨유가 아닌 토트넘으로 이적했다는 것.
내막은 간단했다. 토트넘은 개스코인에게 그의 부모님이 살 집을 장만해 주겠다고 약속했고 해당 조건은 그의 마음을 움직이기 충분했다. 영국 축구의 역사가 바뀌었을지도 모르는 순간이었다.
7. 요한 크루이프(로스앤젤레스 아즈텍스→덤바턴, 1980년)
현역 시절 발롱도르를 세 차례나 수상한 크루이프는 33세의 나이에 스코틀랜드의 덤바턴과 이적 협상을 진행했다. 1970년대 토탈 사커의 선봉장이자 전설 그 자체인 그는 "마음이 크게 흔들렸던 것은 사실"이라고 고백했다. 심지어 덤바턴의 회장과 감독이 직접 암스테르담까지 날아가 설득에 나서기도 했다.
하지만 영입에 성공하지는 못했다. 크루이프는 "스코틀랜드의 악천후를 견디기엔 나이가 너무 많이 들었다"라는 이유로 계약에 서명하지 않았다. 이후 그는 북미 축구 리그(NASL)의 워싱턴 디플로매츠에 합류했다.
8. 마이클 에시앙(번리, 1999년)
번리는 유소년 정책으로 에시앙을 놓쳤다. 에시앙은 U-17 월드컵에서 인상적인 활약을 펼친 뒤 터프 무어에서 입단 테스트까지 받았다. 그러나 아카데미 선수에게는 주급 60파운드(약 10만 원) 이상을 지급하지 않는다는 규정에 이견이 생겨 협상은 마침내 결렬됐다. 에시앙은 프랑스의 바스티아, 올랭피크 리옹을 거쳐 첼시 유니폼을 입었다.
9. 에릭 칸토나(님 올랭피크→셰필드 웬즈데이, 1992년)
셰필드 웬즈데이의 트레버 프란시스 감독은 님 올랭피크에서 다혈질로 이름을 날리던 칸토나를 데려와 테스트를 진행했다. 프란시스 감독은 칸토나에게 정확한 검증을 위해 일주일만 더 머물러 달라고 했지만 단칼에 거절당했다. 리즈 유나이티드로 발걸음을 옮긴 칸토나는 데뷔 시즌이었던 1991-92시즌 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이후 퍼거슨 감독의 부름을 받아 맨유로 이적했다. 왕이 탄생한 전설의 서막이었다.
10. 찰리 아담(블랙풀→토트넘 훗스퍼, 2011년)
당시 블랙풀의 주장이었던 아담은 이제껏 듣도 보도 못한 가장 황당한 이유로 이적이 무산됐다. 때는 바야흐로 2011년 겨울 이적시장 마지막 날. 블랙풀과 토트넘은 아담 이적 협상에 한창이었다. 그러나 서류에 서명해야 할 블랙풀 보드진이 감감무소식이었다. 심지어 마감일 밤늦은 시간이 되도록 연락이 닿지 않았다. 알고 보니 새로 바꾼 휴대폰의 전원을 켜는 것을 깜빡 잊고 있었던 것.
결국, 필요한 서류는 11시 2분이 넘어서까지 준비되지 못했다. 하필이면 1년 중 가장 중요한 날 연락이 두절된 탓에 아담의 이적은 불발됐다. 이에 토트넘의 레드냅 감독은 "이제 우리 손을 떠났다"라며 크게 분노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아담은 리버풀, 스토크 시티 등을 거치며 투지 넘치는 허슬 플레이로 '찰장군'이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번역=유다현 에디터
사진=게티이미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