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포투=Brian Beard]

역사상 가장 오래된 축구대회인 잉글랜드 FA컵이 창설 150주년을 맞았다. 눈부신 역사를 기념하기 위해 축구 전문가 브라이언 비어드가 들려준 오래된 FA컵 이야기에는 수많은 비하인드가 숨어 있다.

그간 우리는 FA컵에서 숱한 충격과 놀라움의 순간을 목도해 왔다. 하지만 이 대회에서 안경을 썼던 유일한 선수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는가? 대회 트로피가 언제 도난당했는지 알고 있었는가?

아니면 닐 러독이 대회 결승전에서 패배한 충격을 어떻게 극복했는지는 알고 있었는가? 물론 1편을 봤다면 이젠 그 답을 알고 있겠지만.

여기, 당신의 궁금증을 풀어 줄 30가지 이야기가 있다. 1편에 이어 남은 15개의 일화를 모두 공개한다.

16. 친절한 밀번씨, 너나 잘하세요

1971-72시즌 FA컵 3라운드(64강)에서 헤러포드 유나이티드가 뉴캐슬 유나이티드를 상대로 2-1 승리를 거뒀다. 해당 경기는 FA컵 역사상 가장 유명한 '자이언트 킬링'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헤러포드의 미드필더 로니 래드포드는 대포알 슈팅으로 골망을 흔들며 충격적인 활약을 펼쳤다.

한편 헤러포드의 또 다른 득점자인 리키 조지는 통쾌한 복수를 날렸다. 경기 전날 밤, 자신의 절친이자 BBC의 축구 해설가인 존 모트슨과 함께 호텔에서 술을 마시던 조지는 뉴캐슬의 레전드 재키 밀번과 마주쳤다. 밀번은 조지에게 지금쯤 잠자리에 들어야 하지 않겠냐며 훈수를 뒀다.

이에 조지는 자신이 교체 카드임을 지적하며 "내가 내일 경기에서 결승골을 넣는다면 그 누구도 개의치 않을 것"이라고 답했다. 실제로 조지는 후반 38분 교체 투입됐으며 그가 그라운드를 밟은 지 2분 만에 래드포드가 승부를 원점으로 돌렸다. 이후 연장 전반 13분 직접 결승골을 터뜨리며 밀번의 도발에 시원한 역전승으로 응수했다.

17. 못된 손

1891년 동점 상황에서 논란이 발생해 잉글랜드 FA가 규칙을 변경하기 전까지 FA컵에서 페널티킥(PK)은 도입되지 않았다.

문제가 된 것은 1891년 2월 치러진 노츠카운티FC와 스토크 시티의 FA컵 8강전. 노츠 카운티에서 뛰던 존 잭 헨드리는 경기 종료를 몇 초 남기고 골라인에서 공을 손으로 걷어내며 상대인 스토크 시티의 동점골을 막았다. 그 결과 스토크 시티는 프리킥을 얻었지만 골로 연결하지 못해 준결승 진출에 실패했다. 그리고 이는 PK의 정당성에 대한 여론을 완전히 바꿔 놓았다.

아마 루이스 수아레스의 방에는 헨드리의 포스터가 붙어있을지도 모른다. 수아레스는 지난 2013년 리버풀 소속으로 FA컵 3라운드에서 맨스필드 타운FC를 상대했다. 해당 경기 후반 13분 수아레스가 득점을 터뜨렸으나 공이 그의 손에 맞는 장면이 포착됐다. 하지만 주심이 이를 그대로 골을 인정하면서 고의적인 핸드볼 반칙이었다는 질타를 받았다.

18. 최초의 훌리건

1966년 FA컵 결승전은 최초의 축구 훌리건 덕분에 더욱 유명해졌다.

해당 경기에서 셰필드 웬즈데이에 0-2로 끌려가던 에버턴은 후반전 내리 3골을 넣으며 승부를 뒤집었다. 에버턴의 센트럴리그 리저브팀에서 뛰었던 에디 카바나는 그가 사랑하는 에버턴이 셰필드 웬즈데이를 2-2로 따라잡자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경기장에 뛰어들었다.

카바나는 "골을 넣은 마이클 트레빌콕에게 가장 먼저 달려가 그를 붙잡고 바닥으로 끌어당겼다. 그는 나를 전혀 몰랐기 때문에 흠칫한 듯했다"라며 당시를 회상했다.

이어 "고든 웨스트 골키퍼에게 조언하러 가던 찰나 한 경찰관이 내 코트를 잡아당겼다. 나는 그대로 코트를 벗고 도망쳤다. 그러나 다른 경찰관들도 나에게 달려오는 것을 미처 보지 못했다. 결국, 그중 한 명이 나를 제압했고 나는 마치 사방이 둘러싸인 열차 강도처럼 꼼짝도 하지 못했다"라고 덧붙였다.

19. 다들 주목

1892년 FA컵 결승전은 케닝턴 오벌에서 열린 마지막 경기가 됐다. 축구 관중이 급증하면서 현재 케닝턴 오벌은 크리켓 경기 용도로만 쓰인다. 한편 이날 경기는 최초에 관한 기록을 몇 가지 가지고 있다. 우리가 이날 경기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다.

먼저 오늘날 매치데이 프로그램의 원형은 팀 사진을 사려는 팬들을 위해 제공되던 정보로, 해당 경기에서 처음 시작됐다. 또한, 이 경기는 골망을 최초로 사용한 FA컵 결승전이기도 하다.

20. 용감한 토트넘

1888년 풋볼 리그가 출범한 이래 FA컵 우승을 차지한 유일한 비리그 팀은 어디일까? 그 주인공은 다름 아닌 토트넘 훗스퍼. 토트넘은 1901년 번든 파크에서 열린 셰필드 유나이티드와의 재경기에서 셰필드를 3-1로 이기며 우승컵을 들어올렸다. 당시는 아스널, 첼시, 토트넘 같은 남부 리그 팀들이 풋볼 리그에 합류하기 이전이었다. 한편 토트넘의 샌디 브라운은 FA컵 토너먼트의 모든 라운드에서 골을 넣은 최초의 선수가 됐다.

21. 최다 득점 팀

이번 시즌 토트넘은 FA컵에서 케터링 타운FC와 뜬금없는 경쟁에 불이 붙었다.

토트넘은 지난 2020-21시즌 비리그 팀인 마린FC를 상대로 5골을 몰아치고 위컴 원더러스FC와 에버턴을 상대로 모두 4골을 추가했다. 이로써 케터링 타운을 제치고 FA컵 역대 최다 득점 팀이 됐다. 그러나 케터링 타운은 이번 시즌 FA컵 예선에서 무려 11골을 기록하며 900골의 토트넘을 다시 4골 차로 따돌렸다.

하지만 토트넘은 지난 9일 FA컵 3라운드(64강)에서 모어컴비(3부)를 만나 3골을 터뜨렸다. 케링턴 타운은 예선 4라운드 재경기에서 벅스턴FC에 1-3으로 패배하며 본선 진출에 실패했다. 현재 토트넘은 케링턴 타운의 기록에 1골밖에 남지 않은 상황이다. 이번 시즌 본때를 제대로 보여 줘야 한다.

22. 뒤늦은 시상

1945-46시즌 FA컵 우승팀인 더비 카운티는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직후 금 부족으로 인해 동메달을 받았다. 몇 달이 지나서야 원래 받았어야 했던 금메달을 목에 걸 수 있었다. 그리고 지난 1985년, FA컵 결승전의 첫 퇴장자가 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케빈 모란은 약 40년 전의 기억을 상기시켰다.

1985년 FA컵 결승전에서 맨유는 노먼 화이트사이드의 맹활약에 힘입어 수적 열세를 딛고 연장 혈투 끝 에버턴에 1-0 승리를 거뒀다. 그러나 종료 휘슬이 울린 후 한 잉글랜드 FA 관계자가 퇴장당한 모란이 시상대에 오르지 못하게 막아섰다. 결국, 모란은 퇴장 조치로 충분한 처벌을 받았다는 위원회 결정이 있고 나서야 상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23. 회색마 결승전

1923년 새로 지어진 웸블리 스타디움에서 열린 FA컵 결승전은 자그마치 30만 명이 넘는 관중을 동원했다. 이날 약 1,000명의 서포터들이 입장 과정에서 부상을 당했고, 관중들이 한꺼번에 몰리면서 경기는 11분 만에 중단됐다. 심지어 전반 종료 이후 선수들이 드레싱룸으로 들어가지 못해 하프타임이 5분 만에 끝났다.

이에 기마 경찰들이 경기 진행을 위해 투입됐는데 이때 밝은색의 말이었던 '빌리'가 이날의 상징이 됐다. 이로 인해 이 경기는 훗날 '백마 결승전'으로 불렸다. 또한, 2007년에 새로 개장한 웸블리 스타디움에 백마교를 지어 당시를 기념하기도 했다.

하지만 빌리는 사실 백마가 아니었다. 그는 회색 말이었지만, 당시 사진들이 흑백으로 촬영된 탓에 잘못된 별명을 갖게 됐다.

24. 도난당한 트로피

1883년 블랙번 올림픽FC가 FA컵 트로피를 들어올렸을 당시 한 배은망덕한 팬이 트로피를 찻주전자처럼 생겼다고 묘사했다.

그러나 블랙번 올림픽의 주장이었던 앨버트 워버튼은 "트로피가 랭커셔주에 온 것을 환영한다"며 "여기서 좋은 주인을 만났으니 다시는 런던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라고 자부심을 드러냈다. 결국, 그의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그 트로피는 매해 FA컵 우승팀에게 전달되며 20년 이상 잉글랜드 전역을 누볐다. 그러던 1895년, 아스톤 빌라가 우승한 후 트로피를 전시해 놓은 버밍엄의 한 상점에서 도난당하고 말았다.

25. 세 명의 스탠리

1953년 블랙풀과 볼턴 원더러스의 FA컵 결승전은 70년 가까이 지난 지금까지도 여전히 명경기로 회자되고 있다. 이날 블랙풀의 스탠리 모텐슨은 웸블리 스타디움에서 FA컵 결승전 해트트릭을 달성한 유일한 선수가 됐지만, 스탠리 매튜스의 맹활약에 밀려 많은 사람의 기억에서 잊혔다.

당시 볼턴은 블랙풀이 프리킥을 얻어낸 후반 44분까지 3-2로 앞서 있었다. 그리고 그라운드에서는 두 명의 스탠리가 세트피스 상황을 준비했다. "안녕, 스탠리". 모텐슨이 먼저 도발했다. 그는 볼턴의 골키퍼인 스탠리 핸슨에게 "너희 수비벽 사이에 틈이 있다. 나는 그 틈 사이로 충분히 골을 넣을 수 있다"라고 이야기했다.

그러자 핸슨도 반격에 나섰다. 그는 "절대 성공할 수 없다는 것에 내 은화 한 닢을 걸겠다"라고 응수했다. 결국, 모텐슨은 해당 프리킥을 득점으로 연결하며 해트트릭을 완성하고 팀의 역전승에 크게 기여했다.

26. 오스의 마법사

지금까지 오직 9명의 선수만이 단일 시즌 FA컵의 모든 라운드에서 득점하는 데 성공했다. 심지어 1969-70시즌 첼시의 영웅인 피터 오스굿이 가장 최근 기록으로, 이마저도 50년이 넘었다. 오스굿은 리즈 유나이티드와의 FA컵 결승전 재경기에서 골을 터뜨리며 간신히 이 위대한 대열에 합류했다. 다만, 이는 점점 더 복잡해지는 EPL의 경기 일정 속에 쉽게 반복되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27. 비틀즈의 축구 취향

앞서 언급한 최초의 훌리건 사태(18번 참조)의 현장에는 비틀즈의 폴 매카트니와 존 레논도 자리하고 있었다.

매카트니는 에버턴이 웨스트 브로미치 알비온(WBA)에 1-0으로 패배한 1968년 FA컵 결승전에서도 모습을 드러낸 바 있다. 이후 그는 "가족들이 모두 에버턴이 팬이지만, 나는 리버풀과 에버턴을 모두 응원하기로 했다. 내 손자 두 명도 리버풀 팬이다. 사람들이 어떻게 두 팀을 동시에 응원할 수 있냐고 물으면 교황에게 특별 허가를 받았다고 말한다"라고 털어놨다.

이에 비틀즈의 또 다른 멤버인 조지 해리슨은 "리버풀에는 축구팀이 세 개가 있다. 나는 다른 나머지 한 팀이 좋다"라며 애매한 답변을 남겼다.

28. 심판을 부탁해

지금까지 단 한 명의 선수만이 FA컵 결승전에 안경을 쓰고 등장했다. 심지어 그 주인공은 다름 아닌 골키퍼.

지미 미첼 골키퍼는 프레스턴 노스 엔드의 골문을 든든히 지키며 활약했지만, 1922년 FA컵 결승전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 윌리엄 스미스의 PK를 막아내지 못했다. 결국, 그해 FA컵 우승은 허더즈필드에 돌아갔다.

또한, 미첼은 잉글랜드 국가대표 골키퍼 장갑을 한 차례 꼈으며, 해당 경기에서도 안경을 쓰고 등장했다. 이로 안경을 착용한 유일한 잉글랜드 대표팀 선수에 이름을 올렸다.

29. 당신이 다시 심판입니다

잉글랜드 축구 심판계에서는 FA컵 결승전의 주심으로 임명되는 것이 최고의 영예로 여겨진다. 그리고 앤서니 테일러 주심은 지난 2020년 FA컵 결승전 심판으로 재차 배정되며 아서 킹스콧 이후 결승전을 두 번 치른 최초의 심판이 됐다.

잉글랜드 FA는 1902년부터 '결승전 1회 배정' 원칙을 도입했다. 이 규정에 따라 각 심판은 FA컵 결승전을 한 번씩만 맡을 수 있게 됐다. 다만, 부심이나 대기심 횟수에는 제한이 없다.

그러나 지난 2020년 코로나19의 여파로 어쩔 수 없이 테일러 주심이 FA컵 결승전에 배정되며 이 오랜 전통이 깨졌다. 2021년에도 비슷한 상황이 펼쳐져 마이클 올리버 주심 또한 두 번째 FA컵 결승전을 주재했다.

과거 프랜시스 마린딘 대령의 경우 1880년 FA컵 결승전에서 첫 심판직을 맡은 뒤 1883년부터 1890년까지 8회 연속 결승전 심판으로 배정된 바 있다.

30. FA컵 대표 '노장'

테디 셰링엄은 42세까지 경기를 소화하며 오랜 선수 생활을 이어갔다. 실제로 셰링엄은 EPL 최고령 해트트릭(37세 146일) 기록과 EPL 최고령 득점(40새 248일) 기록을 모두 보유하고 있다. 하지만 그에 못지않았던 빌리 메러디스에 관한 기록은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다.

메러디스는 1904년 맨체스터 시티에서 FA컵 우승을 맛봤으나 2년 후 상대에게 뇌물을 공여하고 승부를 조작했다는 혐의로 자격 정지 징계를 받았다. 그런 가운데 맨유로 이적해 1909년 두 번째 FA컵 트로피를 들어올렸다. 이후 그는 1921년 맨체스터 시티로 복귀를 선택했다. 1924년에는 뉴캐슬과의 FA컵 준결승전에 출전해 49세 8개월의 나이로 FA컵에 출전한 최고령 선수가 됐다.

번역=유다현 에디터

사진=포포투UK, 게티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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