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2.wiki] 아브레우: 29개 클럽 거친 ‘저니맨’ 이야기

기사작성 : 2019-12-09 15:09

- 세계에서 가장 많은 팀을 거쳐 기네스북에 오른 사나이
- 저니맨으로 장수한 비결은?
- 파넨카킥의 대가가 말하는 파넨카킥

본문


[포포투= Martin Mazur]

세계에서 가장 많은 클럽을 거친 선수가 있다. 우루과이 대표팀 출신의 세바스티안 아브레우다. 1995년부터 2019년까지, 자그마치 29개 클럽을 경험했다. 가장 많은 클럽에서 뛴 축구선수로 <세계 기네스북>에도 등재됐다. 그의 여정은 현재 진행형이다. 도대체 무엇이 그를 움직이게 만들었을까. 아브레우가 자신의 스토리를 <포포투>에 공유했다. 생생한 육성이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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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루과이 시골 소년에서 축구 선수로

축구는 나의 유일한 꿈이었다. 나는 43세지만 여전히 축구화를 신고, 새로운 클럽으로 이적을 한다. 지금까지 29개 클럽에 몸담았다. 아직도 뛰는 게 재밌다. 라커룸을 공유하고, 골을 넣는 게 좋다. 시간은 계속 흐르지만 기회를 잡기 위한 나의 마음가짐은 변하지 않는다. 내가 거쳐온 팀들과 감독들은 늘 내가 무언가 해낼 거라고 생각했다. 나는 호나우지뉴, 펩 과르디올라, 디에고 포를란, 에딘손 카바니, 오스카 루게리, 콰우테모크 블랑코, 루이스 수아레스, 로이 마카이 등의 스타들과 함께 뛰었다. 월드컵을 두 번 경험했고 코파 아메리카에서 우승컵도 들어 올렸다. 우루과이 역대 득점 순위 7위에 올라있다. 개인 통산 총 422골을 넣었다. 이만하면 괜찮지 않은가?

어떤 아이들은 소방관이 되고싶어 한다. 파일럿이나 우주 비행사를 꿈꾸는 아이들도 있다. 우루과이에서 대부분 아이들은 축구선수를 꿈꾼다. 그러나 정작 꿈을 이루는 아이들은 몇 명이나 될까?

나는 미나스에서 태어났다. 다른 우루과이 도시와 비교하면 우리 지역엔 이렇다 할 최고의 축구선수가 없었다. ‘폭탄’이라 불렸던 호르헤 비야르 정도였다. 그는 1987년 CA페냐롤에서 코파 리베르타도레스를 손에 쥐었다. 그게 전부다. 축구선수를 딱 한 명 배출한 작은 도시에서 태어난 기분을 아는가? 참 힘들고 어려웠다. 나는 우루과이 챔피언 나시오날에서 뛰고 싶었다. 사람들은 나를 비웃었다. 그들은 내가 망상에 빠져있다고 했다. 그러나 해보지도 않고 어떻게 알겠는가?

1993년, 나는 우루과이 U-17 대표팀에 선발됐다. 디펜서 스포르팅과 계약했다. 그렇게 꿈을 이뤄가기 시작했다. 이후 몬테비데오로 이적했다. 1년도 채 되지 않아 유소년 아카데미에서 성인팀으로 올라갔다. 리버풀을 상대로 데뷔전을 치렀다. 아, 우루과이에 있는 리버풀이다. 나의 꿈에 변화가 찾아왔다. 늘 새로운 꿈에 집중했다. 천천히 하나씩 이뤄나갔다. 1부리그에서 몇 차례 경기를 치른 후 나의 목표는 나시오날 입단으로 바뀌었다. 유년 시절 응원 팀이었다. 그리고 챔피언이 되고 싶었다. 월드컵에서 나의 골로 우승컵을 들어 올리고 싶었다.

# 세계 최고 저니맨의 여정

이제 내가 거친 클럽을 순서대로 나열해보자. 1) 디펜서 스포르팅, 2) 산 로렌조, 3) 데포르티보 라 코루나, 4) 그레미우, 5) 테코스, 6) 나시오날, 7) 크루즈 아주르, 8) 나시오날, 9) 클럽 아메리카, 10) 테코스, 11) 다시 한번 나시오날, 12) 도라도스, 13) 몬테레이, 14) 산 루이스, 15) 티그레스, 16) 리베르 플라테, 17) 베이타르 예루살렘, 18) 다시 리버르 플라테, 19) 레알 소시에다드, 20) 아리스, 21) 보타포고, 22) 피구렌세, 23) 네 번째 나시오날, 24) 아우카스, 25) 또 나시오날, 26) 로사리오 센트럴, 27) 다시 나시오날, 28) 솔 데 아메리카, 29) 산타 테클라; 30) 반구, 31) 센트럴 에스파뇰, 32) 푸에르토몬트, 33) 아우닥스 이탈리아노, 34) 마가야네스, 35) 리우 블랑코, 36)보스턴 리버. 29개 클럽을 모두 적었나? 좋아! 아직 내 기억력은 죽지 않았군.

다른 나라 클럽들을 오간 첫 번째 비결은 문화에 대한 적응이다. 문화 차이에서 벗어날 다른 방법은 없다. 나라가 내게 맞춰주진 않으니 내가 그 나라에 맞춰서 살아야 한다. 두 번째는 성장과 배움, 새로운 성취다. 내가 성장할 수 있는 팀이 아니면 절대 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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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은 내 결정에 대한 책임감이다. 누구도 나를 대신해 선택해주지 않는다. 가끔 새로운 클럽과 계약을 한 다음 날 바로 후회했던 동료들의 말을 듣긴 한다. 그들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이 원해서 한 이적은 참 힘들다.

나는 우루과이, 아르헨티나, 멕시코, 스페인, 이스라엘, 그리스, 엘 살바도르, 칠레, 에콰도르, 파라과이, 브라질에서 뛰었다. 모든 나라에서 내가 배우고 싶었던 축구 스타일을 발견했다. 전술을 중시하거나, 피지컬을 더 중요한 가치로 여기거나, 기술적 부분이 필요한 축구 등이었다. 새로운 클럽과 계약을 하면 나는 그 팀의 이전 시즌 경기를 챙겨봤다. 최소 10, 15경기를 봤다. 그렇게 팀 스타일을 배우고 리그에서의 경쟁력을 익혔다.

이스라엘 경기는 훨씬 공격적이었다. 그들은 어릴 때부터 나라를 지켜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준비하기 때문이다. 그런 정신력은 당연히 그라운드에서도 드러났다. 멕시코는 다이나믹했다. 많은 팀이 고도가 높은 곳에서 뛴다. 급격한 날씨의 변화까지 견뎌야 한다. 브라질은 풀백과 윙어의 천국이다. 브라질을 삼바와 맥주의 나라로 알고 있다면, 당장 그 생각을 고치시라. 축구 인프라가 환상적이다. 남아메리카의 태평양 연안에선 점유율을 중요시한다. 기술 능력은 기본이다. 나는 내가 내가 왜 브라질을 선택했는지 이유를 찾고 싶었다. 그렇게 미래의 감독을 꿈꿨다.

멕시코의 도라도스에서는 펩 과르디올라와 함께 뛰는 영광을 누렸다. 당시 그는 감독을 준비하고 있었다. 모랄레스와 나는 펩과 감독 후안마 릴로의 격한 전술 논쟁을 지켜봤다. 한쪽에선 포크와 수저를 들고 공격했고, 다른 한쪽에선 칼을 집어 들었다. 다른 전략이 침범하지 못하게 말이다. 우리는 늘 저녁 8시에 식사를 했다. 그 둘은 밤 11시까지 그 자리에 남아서 입씨름을 벌였다. 두 천재의 ‘마스터클래스’였다.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나면 생각이 생각의 꼬리를 물어 밤을 꼬박 지새울 수밖에 없었다.

# 세계를 돌면 천재들을 만난다

나는 여전히 과르디올라와 연락을 주고받는다. 정말 기쁘다. 그는 디테일을 아주 중요시 한다. 그가 이루어낸 모든 것들이 이 한 문장으로 설명이 된다. 2008-09 시즌, 바르셀로나가 UEFA 챔피언스리그(이하 UCL)에서 우승했다. 그때 바르셀로나는 UCL에 참가하기 위해 예선전을 치렀었다. 바르셀로나는 바이타르 예루살렘-비스와 크라쿠프전 승자와 만날 예정이었다.

당시 나는 바이타르에서 뛰었다. 우리는 2차전에서 0-5로 패배해 UCL 무대에서 물러났다. 며칠 후 과르디올라가 내게 전화했다. “너 정말 잘 뛰더라. 움직임이 좋았어”라고 말했다. 그는 비스와 선수들에 대한 나의 의견을 물었다. 한 명도 빠짐없이 말이다.

리버플레이트에선 디에고 시메오네가 나의 감독이었다. 그는 과르디올라만큼 열정적이었다. 디에고와 눈만 마주쳐도 그 열정을 고스란히 전달받을 정도였다. 그들과 함께 축구를 하고, 배우는 것은 정말이지 영광이었다.

운좋게도 부상을 당한 적은 없다. 내가 계속 뛸 수 있다는 자신감은 바로 여기에서 나온다. 하지만 내가 여전히 축구를 하는 진짜 이유는 내 자신을 위해서다. 맞춤형 훈련이나 식이조절 없이도 여전히 축구를 하고 있다. 가끔 개인 트레이너, 피지오, 영양사 등이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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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니맨의 장수 비결

내게 도움이 된 조언 한 가지를 전하겠다. 나는 새로운 나라에 도착하면 거리로 나가 전통적인 음식을 전부 먹어본다. 먹고, 먹고, 또 먹었다. 그러면 내 입맛에 맞는 음식과 안 맞는 음식이 딱 갈린다. 정말 중요한 부분이다. 동료가 저녁 식사를 초대하는 일이 흔하기 때문이다. 어떤 음식을 좋아하는지 말할 줄 알아야 한다. 그래야 초대해준 사람들 앞에서 난생처음 보는 음식에 머뭇거리지 않는다.

동료와의 대화는 필수다. 그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아야 하니까. 나는 베테랑 선수다. 그렇다고 채찍을 들고 라커룸에 들어간다는 뜻은 아니다. 커리어 초반에 나는 경험 있는 선수들의 말을 늘 귀 기울여 들었다. 그때 배운 것들을 어린 선수들에게 전달해주고 싶다. 물론 리오넬 메시나 루이스 수아레스, 에딘손 카바니는 재능이 타고난 케이스다. 하지만 열정은 모두 똑같다.

우리 가족은 내가 이적하는 나라로 늘 따라왔다. 그러다 2013년 아이들을 위해 우루과이에 머물러야겠다고 깨달았다. 한 학교에 머물면서 교육에 혼동이 생기지 않도록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나의 딸 발렌티나는 18세다. 아들 디에귀토는 15세다. 디에귀토는 내 커리어가 시작된 곳인 디펜서에서 뛴다. 나의 세 아들 디에고, 프랑코, 파쿤도 모두 축구 인생을 걷기 시작했다. 그들 곁에서 세세하게 조언을 해줄 수 없어 안타깝다.

축구선수 생활을 하면서 가족과 함께할 시간을 많이 잃어버렸다. 모든 축구선수가 똑같이 말할 거다. 나는 지금이라도 당장 은퇴할 수 있지만 여전히 뛰고 있다. 이걸 그만두면 다시는 돌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축구선수도 사람이다. 역경과 고난을 마주한다. 이런 사실을 아는 사람이 별로 없는데 내 아이들의 친구들이 내가 바로 그런 선수라고 한다. 아이들이 그걸 자랑스러워 하는 모습을 보면 기분이 좋다. 나는 그들이 아직 들어본 적 없는 나의 유년시절 이야기도 들려줄 계획이다.

#축구는 널리 사람을 이롭게 한다

축구는 내게 많은 기회를 줬다. 대단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고, 훌륭한 친구들도 사귈 수 있었다. 루이스 수아레스는 내 가족이나 마찬가지다. 나의 아이는 그를 대부로 여긴다. 그는 골프나 테니스처럼 늘 같은 강도로 경기에 임한다. 우루과이 출신으로서 나는 그가 바르셀로나와 대표팀에서 9번 공격수로 뛰는 게 자랑스럽다.

수아레스는 꿈을 이루기 위해 힘껏 전진했다. 그의 첫 유럽팀은 바르셀로나가 아닌 네덜란드의 흐로닝언이었다. 당시 그는 흐로닝언이 자신이 뛰기에 적합한 팀이라고 생각했다. 자기가 원하는 삶에 한 발짝 다가가고 싶었다. 꿈은 우리가 좇아야 하는 존재다. 우리가 오기를 기다려주지 않는다. 내가 바로 그 예시다. 우리 지역 유망주들은 지금 힘든 시간을 견디고 있다. 나 역시 그런 시간을 이겨냈다고 말해주고 싶다. 돈이나 자원을 떠나서 말이다.

우루과이는 최근 많은 변화를 겪었다. 모든 게 엘 마에스트로(El Maestro), 오스카 타바레스 덕분이다. 그는 선수들에게 프로 정신, 존중심, 가치 등을 가르쳤다. 그는 우리에게 축구선수일 뿐만 아니라 나라를 대표하는 인물이자 자라나는 아이들의 본보기라고 말했다. 그의 말에 공감한다. 그는 우루과이에 축구 그 이상의 것을 심어줬다.

2010 FIFA 월드컵 4강에서 네덜란드를 만나기 하루 전, 나는 저녁 식사 자리에서 디에고 루가노, 세바스티안 에귀렌, 안드레스 스코티와 함께 긴 대화를 나눴다. 우리가 이 세상에 어떤 유산을 남길 수 있을지를 말이다. 우리는 자선단체를 설립하기로 했다. 이름은 ‘펀다시온 셀레스테(Fundacion Celeste)’다. 무려 월드컵 4강 전날에 이런 대화를 나눴다!

이 대화를 통해 나는 선수들의 헌신을 느꼈다. 우리는 남아프리카로 돌아간 후 다시 저녁 모임을 가졌다. ‘펀다시온 셀레스테’는 우리의 자부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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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치광이의 파넨카킥 신념

나의 별명은 ‘미치광이(Loco)’다. 산 로렌조 시절 골 세리머니 덕에 붙은 별명이다. 그러나 경기장에 있는 사람들은 알 거다. 난 그리 미치지 않았다. 믹 제거는 춤까지 추는데 아무도 그에게 ‘Loco’라고 하지 않는다. 나는 내가 라커룸에 긍정적 분위기를 전달해준다고 생각한다.

나는 내가 ‘저니맨’이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사실 틀린 말은 아니다. 1년에 3번 팀을 옮긴 적도 있으니까. 그러나 보타포고에선 거의 3년 가까이 머물렀다. 내가 진심으로 원해서 이적한 특별한 팀들 중 하나다. 클럽의 목표와 그에 대한 내 느낌이 잘 맞았다.

나는 파넨카킥으로도 유명하다. 나는 페널티킥을 성공시키는 법을 네 가지나 알고 있다. 파넨카킥은 그중 하나다. 충분히 연습하고, 골키퍼를 주시해야 한다. 그가 일찍 몸을 날리지는 않는지 끝까지 지켜봐야 한다. 나는 2011년에 마지막 파넨카킥을 성공시켰다. 2010 FIFA 월드컵 8강 가나전 승부차기까지 포함해 약 25개 이상의 파넨카킥 득점을 기록했다. 2011년 이후 나는 절대로 파넨카킥을 이용하지 않았다. ‘아브레우가 또 해냈다’라는 문구가 마음에 들지 않았기 대문이다.

피카소는 자신이 그린 최고의 작품을 반복해 그리지 않았다. 그러니 내 파넨카킥도 좋은 기억으로 남겨달라. 골키퍼들은 아직도 파넨카킥을 차지 않겠다는 나의 다짐을 믿지 않는다. 그게 나의 성공을 돕기도 한다. 말해두겠다. 고별전을 치르는 날까지 다시는 칩샷으로 페널티를 차지 않을 거다. 하지만 고별전에서는 골키퍼가 방향을 정해야 한다는 걸 알았으면 좋겠다. 그땐 파넨카킥을 찰 테니까.

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포포투 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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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편집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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