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2.wiki] 축구팬의 뿌리를 찾아서

기사작성 : 2018-08-29 15:21

- 레플리카를 입기 시작한 건 언제?
- 훌리건은 어떻게 생겨났을까?
- 축구 팬덤에도 족보가 있다

본문


[포포투=Paul Brown]

고대 로마의 꼬마 팬부터 통계로 무장한 키보드 워리어까지. <포포투>가 축구 팬덤의 기원을 찾아 정리했다. 생각보다 다양하다. 심지어 시대를 따라 ‘진화’했다. 당신은 어느 ‘종족’에 속하는지 탐구해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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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0년 전에도 팬덤은 존재했다
축구가 생겨난 이래 늘 팬이 존재했다. 축구 역사에 가장 먼저 기록된 팬은 고대 그리스 꽃병에 새겨진 한 소년이다. 기원전 4세기경 만들어진 이 꽃병은 현재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미술관에 있다. 예복에 가까운 옷차림의 소년은 볼을 저글링 하는 남자를 놀란 눈으로 바라본다.
로마인들은 축구의 기원으로 알려진 하르파스툼이라는 경기를 관람했다. 당시 대중적 오락이었던 이 스포츠는 기독교인들을 사자에게 던져주는 것보다는 덜 폭력적이었다. 토가를 입은 하르파스툼 팬들이 우리에게 익숙한 고함을 질렀다는 역사적 기록도 남아있다. “바닥에!”, “너무 짧아!”, “뒤로 패스해!” 등이다. 심지어 피소라는 선수에게는 “여전히 대중을 놀라게 하는 플레이를 보고 싶다면...”으로 시작되는 응원가까지 있었다.

# 마을 경기는 더비의 기원
마을끼리 벌이는 전통적인 경기가 중요한 행사가 되었다. 무질서하고 종종 폭력적이기까지 했던 이런 경기는 중세부터 빅토리아 시대까지 몇백 년 동안 영국 전역의 소도시와 마을 거리를 파괴했다. 수백 명이 참여한 경기는 몇 시간 동안이나 계속됐고 사망자가 발생하거나 폭동으로 번지기도 많았다. 주민들은 거리에 줄지어 섰고 창문, 지붕 등에서 구경하며 자기 동네 선수들을 응원했다. 거친 응원이 쏟아지는 가운데 라이벌 관계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팬들은 가장 좋아하는 선수에게 꽃을 던졌고 상대에게는 진흙을 던졌다. 마을 아이들은 좋아하는 팀의 구호를 외쳤다. 긴 경기가 계속되는 동안 군중은 선수들에게 맥주잔을 전달하며 응원했다.

# 노동계급 축구팬 등장
1880년대 공장과 제분소, 주물공장에서 노동계급 축구팬이 등장했다. 노동시간이 법적으로 제한되면서 토요일 오후에 쉬게 된 이들은 ‘찐빵 모자’를 쓰고 축구장으로 향했다. 여가 선택이 좁았던 시절이라서 축구가 새롭게 인기를 얻기 시작했다. 초기 풋볼리그 경기의 일반적인 입장료는 6펜스였다. 대다수 팬은 스탠드에 선 채 담배를 피우고 노래를 부르며 축구를 즐겼다. 추가 요금을 내고 좌석에 앉거나 식음료 판매대 위의 최고 관람석을 찾는 부유한 팬들도 있었다. 1800년대 후반에는 경기일에 ‘보브릴’이라는 음료를 즐겼다.
당시의 육체노동자는 의무적으로 초등 교육을 받은 첫 세대였다. 글을 읽을 수 있었던 이들은 새로이 좋아하게 된 스포츠를 열정적으로 배우려 했다. 이들이 신문으로 축구를 공부하면서 판매 부수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기 시작했다. 서포터즈는 원정 경기 소식을 듣기 위해 지역 신문사 밖에 모이곤 했다. 초기에는 메시지 전달용 비둘기를 보냈으나 경기장마다 전신주가 설치되면서 소식 전달이 좀 더 빨라졌다.
풋볼리그가 창설한 1888년 한 신문은 노동계급 축구팬의 등장이 어떤 의미를 지녔는지 짚었다. <노던 에코>는 “축구가 특정 계급에 한정되어 있었던 몇 년 전만 해도 선수들과 친구들만 관심을 가졌다”라고 적었다. “이제는 모든 계급을 대표하는 스포츠가 된 축구가 전국의 수많은 관중에게 즐거움을 선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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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젠틀맨이 선도한 관전 문화
현재의 축구는 1863년 런던의 한 술집 뒷방에서 탄생했다. 기다란 턱수염과 풍성한 구레나룻을 자랑하는 부유한 신사(젠틀맨)들의 작품이었다. 초기의 클럽 경기는 제일 좋은 옷을 입고 관람해야 하는 사회적 행사였다. 프록코트와 조끼, 형형색색의 네커치프에 번쩍번쩍 빛나는 실크해트(남성 정장용 모자)나 중절모를 갖췄다. 당시 신문에는 “여성도 다수 참석해 이 스포츠에 매력을 더했다”라고 써 있다.
런던에서 잉글랜드축구협회에 등록한 팀끼리 맞붙을 때는 몇백 명이 겨우 모였다. 반면 글래스고나 셰필드처럼 축구에 열광하는 지역에서는 한결 활기찬 관중들이 많이 모였다. 한 신문은 셰필드에서 온 신사들이 “극도로 자유롭게 찬사를 보냈다...동시에 빈정거리기나 지역적 ‘농담’에도 거침이 없었다”라고 묘사했다. 즉, 축구팬들의 ‘농담’은 150년 전통의 덕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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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방에서 즐기는 축구라니
서포터즈가 안락한 자기 집 거실에서 팀의 흥망성쇠를 좇는 건 새롭지 않다. 1920년대부터 사람들은 생중계를 듣기 위해 라디오 앞에 모였다. 초기 라디오 방송은 해설을 알아듣기 어려울 정도로 음질이 나빴지만, 현장에 있는 것처럼 요란스러운 응원 소리를 고스란히 전했다. 신문들은 전문가들의 해설을 “중요한 축구 경기의 분위기를 전하는 멋진 아이디어”라 평했다.
1938년 처음으로 축구 경기가 텔레비전으로 방송되었다. 시청자들은 “관중석에 서서 보는 것만큼 경기를 잘 볼 수 있다”라고 열광했다. 클럽들은 관중이 줄어들 수 있다며 TV중계를 반대했다. 다행히 ‘직관’을 포기하는 이들은 없는 듯했다. 한 전문가는 “진정한 축구 팬은 자기 안락의자에 눌러앉는 대신 경기장에 가는 모든 방법을 찾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 급격히 유입된 대중
1901년 <데일리 메일>은 “100만 명 돌파!”라고 선언했다. 전국에서 폭발적으로 증가한 축구 팬 수를 뜻했다. 이를 증명하듯 크리스털 팰리스에서 열린 1901년 FA컵 결승전에는 11만5000 명이 입장해 최다 기록을 세웠다. 하나같이 모자와 콧수염으로 무장한 떠들썩한 관중은 경기 내내 “덤벼!”라고 외치며 야유와 응원으로 분위기를 달궜다. 골이 터지자 팬들은 “손과 손수건을 흔들고 모자와 지팡이를 던지며 열광했다.
증가세는 1923년 ‘백마 결승전’에서 정점을 찍었다. 하얀 말을 탄 경찰이 웸블리 스타디움의 그라운드에 난입한 수천 관중을 몰아내는 사진과 뉴스 영화가 널리 퍼졌다. 공식 수용 규모가 12만5000 명인 웸블리에서 열린 첫 번째 축구 경기였는데 이날 30만 명이 입장했다고 추정하는 이들도 있다.

# 응원을 만든 자
전후 1940년대 후반과 1950년대의 축구팬들은 축구 역사상 가장 다채로운 존재였다. 어두운 색의 정장과 외투에 만족했던 이전 팬들이 이제는 클럽의 색이 담긴 스카프와 모자, 리본, 그 외의 다른 축구 상품으로 무장하기 시작했다. 당시의 한 기자는 “깃발이 나부끼고, 떠드는 소리가 하늘로 솟아오른다. 나팔이 울고, 경적이 빵빵거리며, 소스 팬을 두들기는 소리까지 섞인다. 시끄러운 소리를 낼 수 있는 것이라면 뭐든 동원됐다”라고 전했다.
팬들은 일찍부터 노래를 불렀다. ‘나와 함께 거하소서’처럼 활기찬 찬송가도 있었고, 비장한 리듬의 곡들도 있었다. 몇몇 클럽에서는 경기 시작 전 의미가 담긴 특정한 곡을 불렀다. 포츠머스 팬들은 1890년대부터 ‘The Pompey Chimes’를 불렀고 노리치 서포터즈는 1900년대 초기부터 ‘On the Ball, City’를 제창했다. 서포터들이 유명곡을 개사하기 시작한 것도 전후 황금시대였다. 1956년 발표된 ‘케 세라, 세라’(Que Sera, Sera)가 대표적이다.
역사상 최고의 관중 동원도 기록됐다. 1948-49시즌 4120만 명이 넘게 풋볼리그 경기를 관람했다. 1부 평균 관중 수가 3만8792명에 달했다. 지금까지 시즌 최다 기록으로 남아있다. 입장료도 올랐다. 1948년 1실링이었던 풋볼리그 최소 입장료가 1955년에는 2실링이 되었다. 현 물가로 약 5천 원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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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훌리건 등장
축구 훌리건은 빅토리아 시대부터 존재했다. 그 존재감이 짙어진 건 1960년대 들어서다. 60년대 중반 팬들은 팀을 상징하는 색상과 구호로 뭉쳐 훨씬 구분이 쉬웠다. 움직임도 한층 자유로워서 원정 경기에 많은 수가 모여 이동했는데, 상대의 홈경기장에 도착할 때면 청바지에 운동화, 브이넥 티셔츠 같은 평상복을 맞춰 입고 강렬한 인상을 주려 했다.
훌리건 조직이 처음으로 등장한 것도 이 즈음이었다. 제일 먼저 두각을 드러낸 조직은 1970년대 초반 올드 트래퍼드와 전국 곳곳에서 문제를 일으킨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하드코어 소모임 ‘붉은 부대’였다. 이후 몇 년 동안 웨스트 햄의 ‘ICF'(Inter City Firm)와 리즈 유나이티드의 ’서비스 크루‘, 첼시의 ’헤드헌터스’ 등이 이름을 알렸다. ‘밀월 부시웨커스’라고 불린 밀월의 ’F-트룹‘이 가장 악명 높았다.
70년대 중반이 되자 신문 1면에 “축구계의 수치”라는 제호 아래 그라운드를 습격한 훌리건 사진이 자주 등장했다. 1977년부터 1985년까지는 영국 축구 역사에서 가장 폭력적인 시간이었다. 훌리건이 판을 치면서 관중 수가 급격히 감소했다. 훌리건은 극소수였지만 이들이 일으킨 문제는 팬덤 전체에 영향을 미쳤다. 언론 보도를 통해 축구 팬은 모두 ‘폭력적 망나니’라는 인식이 널리 퍼졌다. 결국 그라운드 주위에 울타리가 생겼고 팬들은 우리에 갇힌 동물 같은 취급을 받게 되었다.

# 레플리카: 상업시대 도래
프리미어리그 시대가 도래하면서 레플리카 유니폼을 입은 팬들이 급증했다. 70년대부터 판매용 유니폼이 있긴 했다. 1973-74시즌 리즈 유나이티드의 유니폼 상의를 만들었던 ‘애드미럴’이 처음 레플리카를 판매했다. 가격은 1만5000 원 정도였다.
레플리카 팬들은 밝고 환한 미래를 상징한다. 축구 경기장은 훨씬 안전하고 편안한 장소가 되었지만, 시설 투자 비용이 고스란히 입장권에 반영됐다. 1989-90시즌 가장 싼 입장권은 4500원 정도였는데, 10년 만에 2만 원 정도로 올랐다. 이런 물가 상승에서 호주머니가 가벼운 팬들이 떨어져 나가기도 했다. 입석이 없어져 수용 규모가 줄었고 분위기도 가라앉았다. ‘집관’에 정착한 팬들의 빈자리를 이른바 ‘관광객’이 메웠다. 이제는 관중석에서 TV중계를 보는 듯한 편안함을 요구하는 시대가 되었다.
객단가도 올라갔다. 값비싼 ‘새우 샌드위치’를 즐기는 팬들이 늘어났다. 이런 풍조를 놓고 로이 킨은 “여기에 온 사람 중 몇몇은 축구의 철자도 모를 거지만, 그들을 이해하고 싶지는 않다”라고 꼬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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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축구 힙스터
축구 힙스터는 현대 축구의 과잉을 한탄하며 비싼 운동화와 안드레아 피를로에 집착한다. 그러나 상파울리의 유니폼과 덜위치 햄릿의 스카프로 무장한 이들은 사실 축구계에서 이용당하고 있다. 이들은 패션과 음악, 과거의 축구에 대한 노스탤지어를 결합한 대안적 팬 문화를 만드는 데 일조했다. 블로그와 화려한 팬진을 통해 문화를 전파했다. 많은 이가 팬덤 전체의 경험을 향상시키는 데 능동적인 역할을 하기도 했다.
축구 힙스터들은 아마추어 리그를 유행시키며 클럽의 외양과 관중 수를 끌어올렸다. 프리미어리그 안에만 갇혔던 팬들의 관심을 이제 유럽의 다른 빅리그로 확장시키는 역할도 했다. 이탈리아, 독일 등지에서 볼 수 있는 티포를 비롯해 안전한 입석 구역과 팬의 클럽 소유까지 다양한 아이디어를 수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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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팬진 마니아
80년대 영국 축구 암흑기에 많은 이가 축구계 상황, 축구가 팬들을 대하는 방식에 환멸을 느끼기 시작했다. 이들은 팬진을 직접 만들어 팔면서 자기 목소리를 냈다. 결국 영국 내 거의 모든 클럽이 한두 개의 팬진을 갖게 되었다. 하나같이 조악한 편집 디자인을 지녔는데, 그게 독특한 매력을 발산한다.
유머가 중요한 역할을 하면서 QPR의 < R들에게 한방>, 반즐리의 <서쪽 스탠드의 수렁>처럼 불경한 이름을 달고 있었다. 개중 최고는 질링엄의 <브라이언 무어의 머리는 기분 나쁠 정도로 런던 천문관을 닮았다>였다.
팬들이 세상에서 외면당하던 시기에 팬진은 서포터즈의 시각을 설명하며 관계자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잘못된 인식을 바꾸려 노력했다. 그들이 거둔 가장 큰 성공은 인식의 변화였다. 축구 팬들의 이미지를 발랄하고 평화적으로 바꿔놓는 데 이바지했다.

# 인터넷의 백만대군
침실과 카페, 지하철에 앉아 스마트폰으로 축구를 소비하는 팬들이다. 각종 모바일 기기를 통해 생중계와 중계 블로그, 소셜미디어에 접속해 축구를 ‘팔로우’한다. 경기를 보고 의견을 남기며 통계를 공유하고 클럽, 선수들과 소통한다. 우스꽝스러운 자책골이나 기가 막힌 부상 장면이 담긴 ‘움짤’에 ‘좋아요’를 누르고 길거리에서 찍힌 스타플레이어들의 일상 사진을 리트윗한다. 현실에서는 무력하지만, 온라인상에서는 기세가 등등해서 국내에서는 ‘인터넷 여포’라는 비아냥도 받는다.
1992년 출범한 프리미어리그의 대성공 뒤에도 인터넷이 있다. 이제 축구팬은 맨체스터의 올드 트래퍼드에 직접 가보지 않고도 맨유의 ‘열혈 전사’가 될 수 있다. 각종 광고 예산이 온라인과 SNS 분야로 이동하면서 이들은 세상을 움직이는 힘을 발휘한다. 축구팬의 새로운 표준이라고 할 수도 있다.

일러스트=포포투U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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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편집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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