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2.wiki] 골키퍼는 언제부터 특수 포지션이었을까?

기사작성 : 2018-05-28 13:14

- 골키퍼는 언제부터 특수 포지션이었을까?
- 필드플레이어가 골키퍼로 변신하면 어떤 일이?
- 골키퍼가 슛을 쏘는 순간도 있다

본문


[포포투=Paul Brown 외]

골키퍼는 특수 포지션이다. 골키퍼의 전문성이 승패를 가르는 결정적 요인이 되기도 한다(feat.카리우스의 눈물). 축구에서 필드플레이어가 골키퍼 장갑을 끼는 상황은 흔치 않다. 때문에 종종 낯선 그림이 만들어지면 그 자체만으로 흥미진진해진다. 그 역사와 사연을 정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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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웃필드 골키퍼
지금은 필드플레이어가 골대에 들어서는 일이 흔치 않지만 축구 초창기에는 익숙한 풍경이었다. 잉글랜드축구협회(FA)가 1863년 만든 최초의 경기 규정에는 필드플레이어와 골키퍼의 구분이 없었고 누구든 손으로 공을 막을 수 있었다. 1871년에야 지정된 선수 한 명만 손으로 공을 다룰 수 있다는 규칙이 추가되었다.

그렇지만 골키퍼는 특화된 포지션이 아니었다. 골키퍼용 유니폼이나 장갑도 없었고, 경기 중 골키퍼를 바꿀 수 있었다. 1872년 원더러스와 로열 엔지니어스가 격돌한 최초의 FA컵 결승전에서 원더러스의 골키퍼는 평소 하프백 또는 미드필더로 뛰는 레지널드 코트네이 웰치였다. 결승전에서 웰치는 인상적인 수비력으로 언론의 찬사를 얻었다. 그의 무실점에 힘입어 원더러스는 1-0으로 승리해 초대 FA컵 챔피언이 되었다.

그로부터 8개월 뒤인 1872년 11월, 웰치는 최초의 공식 국제대항전이었던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경기에 잉글랜드의 필드플레이어로 출전했다. 잉글랜드 주전 골키퍼인 알렉 모튼이 다치는 바람에 럭비 선수 겸 축구 포워드로 뛰던 로버트 바커가 첫 번째 수문장이 되었다. 바커는 경기 도중 공격수 윌리엄 메이나드와 역할을 바꿨다.

스코틀랜드의 골키퍼도 포워드인 로버트 가드너(퀸즈 파크 주장)였다. 역시 경기 도중에 골키퍼를 바꿔 로버트 스미스가 골대로, 가드너가 전방으로 이동했다. 바커와 메이나드, 가드너, 스미스 모두 골을 허용하지 않아 경기는 0-0으로 끝났다.

이들 대부분 필드플레이어와 골키퍼를 겸했는데, 스코틀랜드의 가드너는 전문 골키퍼로서 경력을 쌓았다. 그는 필드플레이어의 경험을 살려 각도를 좁히며 달려나가는 기술을 연마했다. 가드너를 지켜본 한 기자는 “동세대 가장 비범한 선수”로 꼽았다.

풋볼리그가 창설되고 프로축구선수가 생겨나면서 축구도 진화했다. 골키퍼가 전문 포지션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프레스턴 노스엔드의 지미 트레이너와 선덜랜드의 테드 도이그, 셰필드 유나이티드의 윌리엄 ‘패티’ 폴크 같은 스타 골키퍼가 등장했다.

# 골키퍼 진화 이끈 프로 무대
1888년 FA컵 결승전에서 강호 프레스턴에 맞섰던 웨스트 브로미치의 골키퍼는 봅 로버츠였다. 키가 컸던(193cm) 그는 모든 포지션에서 뛰었는데, 한 전문가는 “공격수로는 쓸모가 없었고 수비진에서는 상대를 막아도 공은 놓쳤다”라고 평가했다. 골문으로 자리를 옮긴 뒤 로버츠는 자신의 거구를 효과적으로 활용했다. 로버츠는 여러 차례 결정적인 선방을 펼쳐 웨스트 브로미치의 2-1 승리에 공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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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드플레이어에서 골키퍼로 전직한 또 다른 유명한 선수는 최초의 흑인 프로축구선수 아서 와튼이었다. 가나 출신인 와튼은 한때 100야드 세계 기록을 보유했던 만능 스포츠맨이었다. 경력 초기 달링턴과 프레스턴에서 뛰었던 그는 측면에 기용되었으나 공을 제대로 다루지 못해 결국 골키퍼가 되었다. 다행히 와튼은 축구 초창기 최고 골키퍼 중 하나가 되었다.

20세기 초가 되자 구단들은 전문 골키퍼와 백업 골키퍼를 보유하게 되었으며 필드플레이어와 다른 유니폼을 입었다. 하지만 당시에는 선수 교체 제도가 없어 경기 중 골키퍼가 다치면 필드플레이어 중 한 명이 그 유니폼을 입어야 했다. 부상당한 골키퍼가 그라운드 밖으로 실려 나오거나 측면으로 이동하고, 필드플레이어 한 명이 골키퍼가 되는 장면이 드물지 않았다.

1913년 FA컵 결승전, 애스턴 빌라의 골키퍼 샘 하디가 부상을 당하면서 하프백 지미 해롭이 골대를 맡았다. 선덜랜드가 빌라를 밀어붙이는 동안 해롭은 수많은 크로스를 주먹으로 쳐내고 두 차례 결정적인 슈팅을 막아내며 영웅적 선방을 펼쳤다. 붕대를 두른 하디가 절뚝거리며 그라운드로 돌아오자 해롭은 하프백 위치로 되돌아가 결승골의 시발점 구실을 해 맨오브더매치 활약을 펼쳤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국제축구연맹(FIFA)은 국가대항전에서 교체 제도를 도입했다. 전반전에 다친 필드플레이어를 교체하고 부상당한 골키퍼는 언제든지 교체할 수 있도록 했다. 1953년 잉글랜드가 웸블리에서 라슬로 쿠발라와 군나르 노르달, ‘분더팀’ 오스트리아의 수문장 발터 지먼 등이 포함된 세계 올스타를 상대한 경기에 새 규정을 시범 적용했다. 4-4 무승부로 끝난 경기의 전반전에 지먼이 다치자 필드플레이어 대신 후보 골키퍼였던 블라디미르 베아라가 골대에 들어섰다. 짜증이 난 잉글랜드 선수들은 지먼이 교체될 정도로 심하게 다치지 않았다고 주심에게 항의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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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글랜드 국내 경기에는 여전히 선수교체 제도가 없었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애스턴 빌라가 맞붙은 1957년 FA컵 결승전에서는 6분 만에 맨유의 골키퍼 레이 우드가 미심쩍은 광대뼈 골절로 실려 나갔고, 센터하프인 재키 블랜치플라워가 골문을 지켰다. 후반전 중반까지 그는 놀라운 수비력을 발휘하며 골문을 지켰으나 끝내 피터 맥파랜드의 두 골을 막지 못했다. 맨유는 경기에서 1-2로 패했다.

# 골키퍼 교체 제도 등장
선수교체가 없던 시절에는 최고의 필드플레이어도 골대로 호출당하곤 했다. 1963년에는 역사상 최고의 필드플레이어라 해도 과언이 아닌 펠레가 골키퍼 지우마르를 대신했다. 산투스가 그레미우를 4-3으로 앞서는 상황에서 경기 종료 5분을 남기고 골키퍼가 퇴장당했다. 그날 이미 해트트릭을 작성했던 펠레는 몇 차례 “환상적인 선방”을 선보이며 팀 승리를 도왔다. 동료 페페는 펠레를 “대단한 골키퍼다. 날아다니는 것처럼 유연했다”라고 칭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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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년 드디어 풋볼리그에도 선수교체 제도가 도입되었다. 하지만 단 한 명만 바꿀 수 있었다. 후보로 골키퍼를 넣는 팀은 거의 없었기 때문에 여전히 필드플레이어들이 골문을 지키는 일이 종종 벌어졌다. 찰턴 애슬레틱의 키스 피콕이 풋볼리그 역사상 최초의 교체 선수로 기록되었다. 하지만 그 대상이 골키퍼 마이크 로스였다는 사실은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 피콕은 왼쪽 측면에 배치되었고 풀백 존 위야가 골대로 들어갔다. 스코틀랜드 대표였던 위야는 무려 4골을 허용해 2-4 패배의 빌미를 제공했다.

교체 가능 숫자가 두 명으로 늘어난 후에도 감독들은 필드플레이어 후보를 선호했다. 1980년대 골문을 지켰던 필드플레이어 중에는 잉글랜드 대표 글렌 호들과 피터 비어즐리도 있다. 1991년 맨체스터 시티의 나이얼 퀸 사례가 제일 유명하다. 더비 카운티전에서 퀸은 골을 터트린 뒤, 퇴장당한 골키퍼를 대신해 상대 페널티킥을 막아냈다.

1992년 프리미어리그가 출범하면서 골키퍼 교체제도가 생겼다. 그렇지만 부상과 레드카드, 이른 교체가 조합되면 여전히 필드플레이어들이 골대 안에서 영웅적 활약을 펼칠 기회가 만들어진다. 리오 퍼디낸드와 존 테리, 비니 존스, 존 오셰이, 로비 세비지, 필 자기엘카, 해리 케인이 모두 임시 골키퍼로 뛴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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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에는 루도고레츠의 수비수 코스민 모티가 일약 스타가 되었다. 슈테아우어 부쿠레슈티와 UEFA챔피언스리그 예선경기 막판 골키퍼가 부상을 당한 채 승부차기에 돌입했다. 팀은 어쩔 수 없이 코스민 모티에게 골대를 맡겼다. 그는 페널티킥을 2개나 막아냈을 뿐만 아니라 직접 키커로 나서 페널티킥을 성공시켰고, 루도고레츠는 사상 처음으로 조별리그에 진출했다.

모티가 등장하기 42년 전, 1972년 1월 웨스트 햄의 레전드 보비 무어도 한 경기에서 골을 넣고 페널티킥을 막아냈다. 불행히 스토크의 마이크 버나드가 튕겨 나온 공을 골로 연결해 웨스트 햄은 리그컵 결승 진출에 실패했다.

# 골키퍼가 슛을 때리는 순간
필드플레이어가 골대에 들어서면 모두가 환호한다. 골키퍼가 필드로 나오는 반대 상황도 팬의 눈에 즐겁기 마찬가지다. 골키퍼 퇴장은 자주 일어나지만, 골키퍼가 자신의 골대를 버리고 전진해야 하는 상황은 여러 가지 조건이 복잡하게 얽혀야만 가능하다.

2016년에도 그런 일이 있었다. 위르겐 클롭의 리버풀은 허더즈필드와 평가전에서 18세 골키퍼 샤멀 조지를 30분간 공격진에 배치했다. 루카스가 부상으로 경기장을 나가고 리버풀은 교체 카드를 모두 써 버린 상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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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는 대니 잉스의 바로 뒤쪽에서 뛰면서 상당히 괜찮은 활약을 펼쳤다. 심지어 건방진 로빙슛으로 골까지 넣을 뻔했지만 오프사이드로 무산되었다. 이후 리버풀이 페널티킥을 얻자 팬들은 조지를 외쳤다. 그러나 클롭은 알베르토 모리노를 택했다. 흥을 망친 남자는 “경기가 1-0일 때는 재미로 결정할 수 없다”라고 변명했다.

재미로 이어가는 이야기. 스튜어트 피어스는 전술적 판단으로 골키퍼를 최전방에 기용한 적이 있다. 2004-05시즌 맨체스터 시티를 지휘했던 그는 1-1 무승부로 끝난 미들즈브러와 최종전에서 마지막 7분간 리저브 골키퍼 니키 위버에게 골문을 맡기고 데이비드 제임스를 공격진으로 끌어올렸다. 피어스는 “상대를 흔들려 했고 어느 정도는 효과가 있었다”라고 회상했다. “사실 우리 팀까지 흔들렸다.” 제임스는 어리둥절한 미들즈브러의 수비수들을 향해 골킥을 하는 것처럼 느릿느릿하게 움직였다.

웬만한 필드플레이어보다 나은 실력을 뽐냈던 골키퍼들도 있다. 바르셀로나의 영원한 후보 골키퍼 호세 마누엘 핀토는 괜찮은 수비형 미드필더였고, 리버풀과 바이에른 뮌헨에서 골문을 지켰던 페페 레이나는 한때 스트라이커로 성공할 꿈을 꾸기도 했다. 그렇지만 최고 무대에서 필드플레이어와 골키퍼로 동시에 실력을 인정받은 이는 호르헤 캄포스가 유일했다.

선수 경력 초기 캄포스는 퓨마스에서 자신이 선호하는 포지션을 소화하며 1989-90시즌을 보냈고 14골을 기록했다. 다음 시즌에는 골키퍼로 복귀했다. 멕시코 국가대표팀에서 130경기에 출전한 캄포스는 종종 전방으로 달려나가곤 했다.

사진=포포투DB, 게티이미지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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