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2.wiki] 마라도나의 첫 볼터치는 ‘알까기’였다

기사작성 : 2018-04-20 01:43

- 인류가 목격한 천재의 탄생기
- 마라도나 프로 데뷔전에서 생긴 일
- 첫 볼터치가 알까기였다는데... 진짜야?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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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포투=Martin Mazur]

(편집자 주: 2017년 3월호 피처 기사입니다. 마라도나의 전설이 시작된 시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프란시스코 코르네호는 2001년 출판한 책 에서 마라도나를 빼앗긴 감독의 심정을 완벽하게, 하지만 다소 극적으로 묘사했다. 그는 “강도를 당한 기분이었다. 대안도 없이 그를 내줄 수밖에 없는 폭력적 강도질이었다”고 적었다. “다이아몬드 원석을 거의 완벽한 보석으로 다듬어낸 예술가 같은 기분이었다. 나는 보석의 사소한 부분까지 모조리 알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나타난 누군가가 그 가치도 모르고 나처럼 애정도 없으면서 그 보석을 돈으로 사버렸다.”

코르네호는 아르헨티노스 주니어스와 제휴한 유소년팀 로스 세볼리타스에서 처음 마라도나를 지도했다. 마라도나의 기술에 놀란 그는 마라도나의 집으로 달려가 모친에게 나이를 확인했다. 꼬마가 여덟 살이라는 걸 믿을 수 없었다. 이후 몇 년 동안 팀은 모든 대회를 휩쓸었다. 디에고는 무시무시한 유망주로 이름을 날렸다. 1군의 문을 두드리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성인 팀이 마라도나를 원한다는 소식을 전한 이는 아르헨티노스의 이사 중 하나인 엑토르 마조니였다. 코르네호는 디에고에게 “너는 어디로도 가지 않을 거야”라고 고함을 질렀다. “이 아이는 너무 작아! 너무 어리다고! 그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당신들한테 책임을 물을 거야. 아직 준비도 안 됐는데 당신들이 이 아이의 선수 경력을 위협하는 거야.” 

감독은 너무 이르다고 생각했다. 분위기가 뜨거워져 당장 주먹다짐이라도 벌어질 듯했다. 정작 마라도나 본인은 그다지 걱정하지 않았다. 프리메라에서 뛸 수 있다는 생각에 이미 두 눈이 동그래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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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년이었다. 그해 초 아르헨티노스 1군 감독 호세 카를로스 몬테스는 당시 15세였던 로스 세볼리타스의 작은 보물을 주목하게 됐다. 이론적으로 디에고가 프로로 뛰려면 유소년 팀에서 다섯 시즌을 보내야 했다. 그렇지만 몬테스는 모든 과정을 건너뛰고 신동을 발탁했다.

2008년 사망한 코르네호는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조만간 때가 오리라는 건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렇게 빨리 올지, 그리고 그토록 고통스러울지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디에고와 작별을 좀 더 미루고 싶었다. 디에고가 1군으로 승격했을 때는 그를 팔아버린 것 같은 고통과 공허함을 느꼈다.”

아무리 넘치는 잠재력을 지닌 선수라 해도 너무 빨랐다. 이사회는 마라도나가 아카데미의 위의 연령대 팀에서 경험을 쌓는 동시에 리저브팀에서 출전 기회를 쌓게 했다.

디에고의 어두운 면이 드러나기 시작할 즈음 1군 데뷔 기회가 다가왔다. 벨레스 사르스필드와의 리저브 경기 중 심판 판정에 격하게 반응해 퇴장당한 마라도나는 5경기 출장 정지 징계를 받았다. 하지만 징계가 운명의 날이 도래하는 건 막지 못했다. 경기력 부진으로 토르네오 나시오날에서 고전하던 아르헨티노스 주니어스에는 불꽃이 필요했다. 부랴부랴 17세 이하 팀의 친선전 2경기까지 만들어 디에고의 출장 정지 경기 수를 채운 뒤, 몬테스는 1976년 10월 20일 열린 타예레스와 프로 경기에 그를 내보내기로 했다. 마라도나의 나이는 15세 11개월 20일이었다.

당시 마라도나는 비야 피오리토의 빈민가에서 가족과 함께 살았다. 1군 출전명단에 포함된 바로 그 날, 구단이 경기장 근처인 비야 델 파르크의 작은 아파트를 얻어주었다. 마라도나의 삶이 급격히 변하기 시작했다.

# 아르헨티나의 절반이 입장한 경기

경기가 열리는 날 아침 9시, 디에고는 홀로 기차를 탔다. 아버지는 공장 근무를 마치고 135번 버스에 뛰어올랐다. 아르헨티노스의 홈구장까지 2시간이 걸리는 탓에 점심시간이 되어서야 도착했다. 매일 반복되는 여정이었지만 이날은 약간 달랐다. 마라도나는 스테이크와 감자 요리를 먹고 잠시 낮잠을 잤다. 잠에서 깬 그에게 15번 유니폼이 건네졌다. 데뷔전을 치르게 될 거라는 소식을 들었다. 마라도나가 등번호 10번을 달지 않은 몇 안 되는 경기 중 하나였다.

아르헨티노스는 타예레스전 공식 티켓 판매는 7577명이었다. 그러나 축구 신동의 첫 프로 데뷔를 보려는 팬들 수십만 명이 몰려들었다고 전해진다. 아르헨티노스 시절 마라도나의 팀 동료였던 리카르도 파예라노는 “아르헨티나 사람들은 다들 ‘나도 갔었어’라고 말한다”라고 농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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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관중 수는 평소의 두 배 정도였다. 그가 뛰었던 유소년 팀 로스 세볼리타스는 140경기 연속 무패를 기록하며 전국적 유명세를 얻었다. 마라도나에 관한 소문은 팬들 사이에서 구전되었다. 모두가 마라도나를 직접 본 것은 아니어도 그를 알고 있었다. 

현재 아르헨티노스는 프리메라디비전 우승 3회, 페르난도 레돈도, 후안 파블로 소린, 에스테반 캄비아소, 후안 로만 리켈메 등을 길러낸 최고의 아카데미로 유명하다. 하지만 1970년대는 우승 전력이나 스타가 없는 소규모 구단이었다. 모든 것이 마라도나에서 시작된 것이다. 빅뱅은 타예레스전 하프타임에 시작됐다.

1군 데뷔까지 산투스 벤치에서 2개월을 기다려야 했던 펠레와 달리 마라도나는 단 45분만 기다리면 되었다. 아르헨티노스가 0-1로 끌려가자 몬테스는 허공에 대고 “꼬마야, 네가 알고 있는 걸 해. 할 수 있다면 알까기를 해 봐라”라고 주문했다. 마라도나는 “꼬마라고 들었을 때, 주위를 둘러봤는데 어린 선수가 많지 않았다. 그래서 나한테 하는 얘기라고 짐작했다. 몸을 풀기 시작한 지 30초 만에 경기에 들어갔다”라고 회상했다.

루벤 히아코베티가 행운을 빌어주었다. 현재 부동산업계에서 일하는 히아코베티는 “내가 평범한 열다섯 살짜리와 교체된 게 아니었어서 다행이다”라고 말한다. “후반전이 계속되는 동안 벤치에 앉아 있었다. 디에고가 뛰는 걸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 그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알고 있었다. 지금은 내 이름이 어떤 식으로든 마라도나의 경력과 연결되었다는 것만으로도 영광이다.”

디에고의 공식적인 첫 플레이는 정말 알까기였다. 투지 넘치는 수비수 후안 도밍고 카브레라가 희생양이었다. 마라도나는 곧 값진 교훈을 익혔다. 카브레라가 마라도나의 턱을 팔꿈치로 가격했기 때문이다. 

중계 영상이 남아있지 않은 상황에서 그 알까기는 일종의 신화이자 전설이 되었다. 많은 이가 디에고 마라도나의 프로 첫 볼터치가 알까기였는지 의심한다. 아르헨티노스의 풀백 움베르토 미누티는 “알까기는 기억한다. 당혹스러우면서도 놀라웠다”라고 단언했다. “그렇지만 그가 그 경기에서 처음으로 공을 잡은 후 한 일이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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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헨티나 신문 <엘 그리피코>는 문제의 터치가 담긴 사진을 찾아내기 위해 신문사 아카이브를 뒤졌다. 당시 쿠바에 살던 디에고가 팩스로 그 악명 높은 ‘알까기’를 확인해주었다. 사진은 이후 봉투에 담겨 희생자 카브레라에게 보내졌다. 2001년 카브레라는 “내가 마라도나의 첫 트릭에 당한 남자로 역사의 일부분이 된 걸 알고 있다”라고 인정했다. “터치라인 바로 옆이었는데 움직임이 아주 빨랐다. 마라도나가 눈 깜짝할 사이 돌아섰고 바로 내 다리 사이로 공이 빠져나가는 걸 깨달았다. 경기장에서 ‘오~’ 하는 동요가 느껴졌다.”

마라도나는 “선수 경력을 통틀어 딱 한 번 손으로 하늘을 만지는 느낌이 들었다. 데뷔전을 치른 다음 날이었다”라고 말한다. 라커룸에서 마라도나는 할리우드 스타가 된 듯했다. 동료, 가족, 친구, 팬은 물론이고 상대 선수와 기자 들까지 디에고와 한 마디를 나누고 싶어 하는 이들이 줄을 섰다. 마라도나는 한 기자에게 “난 열여섯 살이 아니에요. 열흘 후에야 열여섯 살이 돼요”라고 정정해주었다.

# 시작하기 전에 거의 끝났다

마라도나는 5경기 만에 프로 첫 골을 기록했다. 11월 14일 열린 산로렌소 데마르델플라타 경기에서 아르헨티노스가 3-2로 앞서던 후반전 디에고가 투입됐다. 87분 골키퍼 루벤 루칸히올리가 지키던 골문을 열었고, 경기 종료 전 두 번째 골까지 성공시켰다.

루칸히올리는 자신이 역사적인 순간을 함께했음을 감지했다. 그는 그 공과 공을 잡았던 장갑을 기념으로 간직했다. 루칸히올리의 아들 파비안은 “디에고의 기적이 점점 대단해지면서 그의 프로 첫 득점 볼을 갖고 있느냐고 묻는 전화가 쏟아지기 시작했다”고 밝혔다. “어느 날 내 두 살짜리 동생이 그 공을 들고 정원에 나갔다. 공을 보고 개가 달려와 망가뜨렸다. 그래도 장갑은 건졌다.”

마라도나는 이미 국가적 현상이 되어 있었다. 수비수들은 위험한 태클과 팔꿈치, 머리를 날리면서도 그를 막지 못했다. 꼬마는 강인했다. 무릎을 세게 맞은 후 의식을 잃었고 바이러스 감염까지 됐다. 주사기로 관절의 피를 제거해야 했고 항생 치료와 28일간의 깁스를 거친 후에야 완치됐다. 팀 동료들은 경호원처럼 그를 보호하기 위해 그라운드에서 싸움을 벌였다. 부상을 입히려는 선수들도 줄어들었다.

옛 동료 파예라노의 주장처럼 누구도 디에고를 상대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 “8부 경기에서 마라도나가 뛰는 걸 봤는데 너무 인상적이어서 우리 감독에게 이야기했다. 몇 달 뒤 그는 우리와 함께 훈련하고 있었다.”

“디에고가 리저브팀에서 뛴 탓에 1군 주전들이 그와 함께 뛰고 싶다며 조급해 했다. 나는 몬테스 감독에게 ‘제발요. 디에고가 우리랑 뛰게 해줘요’라고 조르곤 했다. 이 세상의 움직임이 아니었다. 수비수 전원을 제치고 골을 넣었다. 두 번씩. 매일.” 파예라노는 디에고가 1994년과 1995년 각각 만디유와 라싱을 지휘할 때 코칭스태프로 일했다.

마라도나는 곧 프리메라의 모든 팬에게 사랑받는 존재가 되었다. (아직) 빅5 클럽 소속이 아니라는 사실, (아직) 말썽을 부린 적이 없었다는 사실이 그의 인기에 기름을 부었다. 그는 겨우 7경기 만에 1군 주전 자리를 꿰찼지만 여전히 순결한 십대 소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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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누티는 애정을 담은 목소리로 “마라도나의 경력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시절이었다. 우리는 모두 그 순간을 목격했다”라고 자랑했다. “프로라는 책임감에 짓눌리지 않고 길거리 아이처럼 축구를 했다. 경기에서나 훈련에서나 마찬가지였다. 그가 공을 가지고 놀라운 것들을 얼마나 많이 보여줬는지 말로 다 할 수가 없다.”

‘길거리 축구’라는 표현은 진실을 담고 있다. 프리메라에서 뛰는 프로선수였지만 마라도나는 동네 주민들과 함께 낡은 축구공을 찼다. 가족, 친구들과 길바닥에 앉아서 카드놀이를 하기도 했다. 디에고가 아내이자 두 딸 달마와 지아니나의 어머니가 된 클라우디아 비야파네를 만난 곳도 옛집 카사 코리조였다. 클라우디아는 7층짜리 연립주택으로 바뀐 마라도나의 집에서 복도 끝에 살았다. 마라도나가 클럽 파르크의 파티에서 그녀에게 춤을 청하기까지 1년이 걸렸다.

기술을 연마할 시간이 모자라진 않았다. 디에고는 훈련이 끝난 후에도 몇 시간씩 혼자 남아 기술을 가다듬었다. 그가 제일 좋아하는 훈련 중 하나는 크로스바를 연속해서 네 번 맞추는 것이었다. 20m 높이에서 떨어지는 공을 7번 연속 발 안쪽으로 컨트롤하는 메뉴도 있었다.

아르헨티노스가 연고를 둔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라파테르날 지역에서는 여전히 그를 기린다. 구단은 2003년 허물어져 가던 홈구장을 개축하면서 그의 이름을 따 ‘디에고 아르만도 마라도나 스타디움’이라고 명명했다. 이후 페레스는 마라도나가 비야데파르크에서 살았던 집을 사들여 박물관으로 개조했다. 토요일 오전마다 교회 예배를 위해 무료로 개방한다. 페레스가 건물을 사들였을 때 디에고가 사용했던 침대 등 가구들이 일부 남아 있었다. 다른 가구들은 중고시장에서 찾아내거나 가족사진을 바탕으로 재현했다. 2016년 하반기 박물관 개장일에 방문한 디에고의 누이 중 하나는 “이 집은 그림만 빼면 70년대 후반 그대로다”라고 감탄했다. “우리는 금요일마다 여기에 와서 일요일까지 머무르곤 했다.” 이곳은 디에고 마라도나가 공식적으로 인정한 첫 박물관이다.

# 디에고와 더러운 전쟁

그렇지만 아르헨티나는 어둠의 시대를 감내하고 있었다. 마라도나가 1군과 훈련하기 시작할 즈음인 1964년 3월 24일,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 이사벨 페론 대통령이 축출됐다. 이후 집권한 극우 정권은 재빨리 계엄을 선포했다.

좌익 게릴라에 맞서는 소위 ‘더러운 전쟁’에서 많은 학생과 정치 활동가들이 연행, 고문, 살해로 희생되었다. 군부는 다가오는 1978년 월드컵을 정부 선전 도구로 활용하기로 했다. 체육인들은 정부의 촉수를 벗어날 수 없었다. 예외는 없었다. 당대 최고 스타 마리오 켐페스는 둘째 딸 이름을 '러시아식 이름'이라는 이유로 나타샤로 짓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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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이 행방불명자 명단에 등록되었다. 군정권 동안 약 3만 명이 사라졌다고 알려졌지만, 정확한 숫자는 아무도 모른다. 정권에 희생당한 유일한 프로축구선수 골키퍼 안토니오 피오보소도 그중 하나였다. 그는 1977년 학창시절 친구의 소재를 찾아내려는 군인들에게 납치되었다. 공산당원이었던 골키퍼 클라우디오 탐부리니는 120일간 구금되었다가 시트로 밧줄을 만들어 탈출한 뒤 스웨덴에 망명을 요청했다. 올림포데바이아블랑카에서 뛰던 앙헬 카파는 스페인으로 탈출했다. 그들 모두 월드컵 출전을 거부했다.

정치적으로 순박했던 마라도나는 군정권의 대표작에 출연할 수 있길 간절히 바랐다. 그는 이미 아르헨티나 20세 이하 대표팀에서 가장 뛰어난 선수였고, 팀의 중심이었다. 뉴웰스 올드 보이스의 수비수 후안 시몬은 “아르헨티나 U-20 대표팀 경기를 치르고 돌아가는 길에 누군가 비행기에서 ‘일요일에 디에고는 공을 만지지도 못할 거야. 후안을 상대하게 될 테니까’라고 말했던 게 기억난다”라고 회상했다. 

“나는 바로 공황상태에 빠졌다. 마라도나도 그 이야기를 들었고 그건 내게 닥칠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이었다. 내가 한 말도 아니었는데 마라도나는 바로 개인적인 문제로 받아들였다. 그는 누군가가 틀렸다는 걸 증명해야 했다. 내가 수비수로 겪은 최악의 날이었다. 정말 당혹스러웠다.”

1977년 있었던 그 해프닝에 관해서 마라도나는 “선수 경력을 통틀어 가장 아름다운 골”이라고 주장했다. “우라칸전 골은 잉글랜드전(1986년 월드컵)의 두 번째 골보다 더 나았다.” 현란한 상하체의 움직임과 알까기, 마지막 기막힌 터치가 어우러진 또 다른 명작이었다.

아르헨티노스에서 공식전 11경기 2골을 터트린 디에고는 국가대표팀에 데뷔했다. 1977년 2월 열린 헝가리전을 앞두고 세사르 루이스 메노티의 호출을 받은 마라도나는 라봄보네라를 화려하게 수놓았다. 오지 아르디예스의 페널티킥 실축에도 아르헨티나는 낙승했다. 디에고는 두 골을 몰아치며 5-1 승리를 이끈 레오폴도 루케와 교체 투입되었다.

그가 불을 뿜고 있었지만, 아아, 실은 아르헨티나도 불타고 있었다. 1978년 FIFA월드컵 조직위원장이었던 오마르 악티스가 자신의 차량에서 총에 맞은 채 발견되자 카를로스 라코스테 중장이 그 자리를 꿰차고 독재자를 위한 꿈을 펼치기 시작했다. 제한 없는 예산과 FIFA의 한 자리가 약속된 고국에서 열리는 월드컵이었다.

메노티도 대표팀 감독에게는 절대 주어지지 않는 기회를 잡았다. 그의 팀은 대회를 6개월 앞두고 소집되었다. 매일 함께 훈련하면서 수없이 친선전을 치렀다. 선수들은 단체 합숙에 돌입했다. 아쉽게도 메노티가 마라도나를 중용하지 않겠다는 심산이었다. 메노티는 “마라도나가 팬들이 원할 때가 아니라 감독인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때에 출전한다는 사실을 팬들은 이해해야 한다”라고 불평했다.

“그는 우리나라 축구를 제대로 보여주는 선수다. 그렇지만 겨우 17세 나이에 최고 평가를 받는 선수가 된다는 건 준비되어 있지 않은 사람에게는 너무 위험하다. 마라도나의 앞에는 엄청난 미래가 기다리고 있지만 그의 발전은 그가 무엇을 하느냐, 어떤 조언을 듣느냐에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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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이 다가오는 시점에도 마라도나는 대표팀 4경기에 출전한 게 전부였다. 선발 출전은 한 번에 그쳤다. 이미 국보 대접을 받은 탓에 외국에 진출할 수 없는 선수들 중 한 명이기도 했다. 국영석유회사들이 그의 연봉을 일부 부담했다. 이후 마라도나는 <올레> 인터뷰에서 “약삭빠른 메노티는 젊은 선수들의 외국 진출을 막아야 한다는 아이디어를 냈다. 아스널과 바르셀로나, 유벤투스의 제안을 받았던 내 머리는 살짝 아수라장이 됐다”라고 회상했다. 

더 큰 아수라장이 이어졌다. 5월 19일 메노티는 25명의 선수를 모은 뒤 그중 3명은 올여름 자기 계획에 포함되어 있지 않다고 선언했다. 그는 큰 목소리로 “브라보와 보타니스, 마라도나”라고 말했다.

마라도나의 경력에서 가장 슬픈 나날이었다. 하지만 대표팀 탈락을 행운으로 받아들일 여지도 있다. 이후 FIFA의 간부가 된 라코스테가 마라도나의 탈락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고 알려졌기 때문이다. 리버 플레이트 서포터였던 라코스테는 리버의 노르베르토 알론소를 구하는 데 권력을 남용했다. 

디에고는 1년 뒤 U-20 월드컵에서 주장으로 팀을 이끌며 소련에 승리한 뒤 비델라 장군에게 이용당하기도 했다. 그는 텔레비전 생방송에서 독재자와 대화해야 했다. 여전히 유순하기만 했던 마라도나가 1978년 월드컵에 출전했다면 정부에 의해 어떻게 정치적으로 이용당했을지 짐작할 만하다. 모누멘탈에서 열린 결승전에서 네덜란드를 3-1로 꺾고 우승한 선수들은 이후 많은 이에게 독재 정부의 비밀무기로 여겨졌고, 역사적 성취도 영원히 더럽혀졌다.

사실 대표팀 탈락은 우리가 알고 있는 디에고의 빛나는 경력의 시발점이었다. 카를로스 아레스 기자의 회상을 들어보자. “그날 나는 저녁까지 팀 훈련장에 남아 있었다. 날이 춥고 어두워져 혼자 가려고 하는데 누군가 우는 소리가 들렸다. 절대 잊을 수 없는 장면이었다. 마라도나가 나무 옆에 앉아서 슬픔을 가누지 못한 채 흐느끼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 ‘네가 얼마나 많은 월드컵에 출전할 수 있는지 알아?’라고 물었다. 어린아이를 위로할 때 할 법한 말이었다. 그렇지만 그는 내게 되레 ‘아빠한테 어떻게 얘기하죠?’라고 물었다. 그는 메노티를 절대 용서하지 않겠다고 했다.”

마라도나는 자서전에 월드컵 대표에서 제외되었던 그날, 이후 자신의 연료가 된 분노를 깨달았다고 썼다. 화가 난 10대 소년은 20세가 되기 전까지 100골을 터트렸다. 이후 일들은 축구의 역사가 되었다.

사진=포포투 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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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편집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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